항목 ID | GC02206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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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原熊川倭城 |
이칭/별칭 | 남산왜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211-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주용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8년 9월 9일 - 창원 웅천왜성 경상남도 기념물 제79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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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창원 웅천왜성 경상남도 기념물 재지정 |
현 소재지 | 웅천왜성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211-1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남도 기념물 |
[정의]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에 일본군이 축조한 성.
[개설]
경상남도 남부 연안 지대에 왜성이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3년(선조 26) 사이로 알려져 있다. 일본군은 1592년 5월 이후 부산포 서쪽 해상에서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에 의해 참패를 맛보았고, 그 결과 일본군은 “수군 원호”와 “보급기지 확보”를 위해 남해안 연안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이순신 함대에게 좋은 항구를 내주지 않으려는 의도로 항구를 감시할 수 있는 산의 정상부에 주 성곽을 설치하고 외곽에 성벽을 설치하면서, 항구를 향한 부분에는 성곽을 설치하지 않았다. 또한 육지에서는 명군의 참전으로 일본군의 주력 부대가 남해안 지역으로 후퇴하자, 남해안 각 지역에 왜성을 지어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1593년 4월 18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양에서 퇴각한 후, 웅천 남산에 형세가 웅장하고 규모가 광대한 창원 웅천왜성을 쌓았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축성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창원 웅천왜성에 장기 주둔한 것은 사실이며,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며 쓰시마 도주인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인근 지성(支城)에 주둔하였다. 요컨대 창원 웅천왜성은 고니시 유키나가 및 소 요시토시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또한 창원 웅천왜성에는 1593년 12월 28일 스페인 출신의 세스뻬데스 신부가 당도하여 약 1년간 은거하면서 가톨릭 세례를 주는 등 종교 활동을 전개한 곳이다. 한국사에서 최초의 가톨릭 신부의 도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창원 웅천왜성의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남산을 택한 것은 지형상으로 해변에 돌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웅포만을 안고 있어 선박 수백 척이 정박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 때문이었다. 아울러 육로로도 상호 연락이 용이하고 해로도 마산, 거제, 가덕도, 안골포와 상호 연락이 용이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철수할 때 성에 불을 질러 내부 건물은 없어졌으나,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벽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왜성의 축성법과 규모를 엿볼 수 있다.
[위치]
창원 웅천왜성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에 위치하고 있다.
[현황]
와성만(臥城灣) 쪽을 향하여 남북 양익상(兩翼狀)으로 V자상을 이루고 있으며, 인근에 지성(支城)이 있었다. 성의 북서쪽에는 웅천 읍성이 있다. 창원 웅천왜성의 범위는 동서 1,000m, 남북 약 500m에 걸친다. 현재 성곽은 부분적으로 잘 남아 있는 편이나, 석축 상층부는 무너진 곳이 적지 않다. 성벽은 대형의 면석(面石)을 상하로 고르게 쌓고 그 사이에 잡석을 채웠으며 자연석 또는 자연할석을 이용하여 잔돌끼워 난적쌓기를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본군이 철수할 때 성에 불을 질러 내부 건물은 없어졌으나,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벽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왜성의 축성법과 규모를 엿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1593년 12월 28일 스페인 출신의 세스뻬데스 신부가 당도하여 약 1년간 은거하면서 가톨릭 세례를 주는 등 종교 활동을 전개한 곳이다. 한국사에서 최초의 가톨릭 신부의 도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창원 웅천왜성의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1998년 9월 9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