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6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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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原沙火郞山烽燧臺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죽곡동 산103-2|명동 산7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형곤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7년 12월 31일 - 창원 사화랑산 봉수대 경상남도 기념물 제186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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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창원 사화랑산 봉수대 경상남도 기념물 재지정 |
소재지 | 창원 사화랑산 봉수대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죽곡동 산 103-2번지, 명동 산 75번지 일대 |
성격 | 봉수 터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남도 기념물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죽곡동에 있는 조선 시대 봉수 터.
[개설]
경상도 방면에서 서울 목멱산[남산]에 이르는 조선 시대 봉수 체제에서 제 2거의 간봉(間烽)으로 동쪽의 가덕도 천성 연대 봉수(天城烟臺烽燧)의 신호를 받아서 서쪽 창원 여음포 봉수(餘音浦烽燧)와 장복산 봉수(長福山烽燧)로 연결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1894년(고종 31) 팔로(八路)의 봉수가 폐지될 때 함께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화랑산 봉수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경국대전』에는 연해(沿海)와 변경의 매 봉화대(烽火臺)마다 봉화대 근처의 거주인으로 군사 10인과 오장(伍長) 2인을 임명하여 배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웅천 읍지』와 『동국여지지』에 따르면 사화랑 봉수의 봉수군보(烽燧軍保)는 100명[군 25인, 보 75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명동 추정 관망석루2 유적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져 형성된 작은 봉우리에 위치한다.
[현황]
사화랑산 봉수대는 남-북간 36~40m 정도, 동-서간 15~20m 정도의 규모를 갖고 있다. 방형상의 외곽에는 2겹의 석축열(石築列)이 돌려져 있고 남서벽은 다소 무너져 있으며 동쪽 장벽의 양 모서리부에는 각 1곳씩 2개소의 문지(門址)가 남아 있다. 중앙부에는 동서로 석축(石築)을 두어 전체를 2부분으로 구획하였다.
그 중 남쪽부는 면적이 20×20m 정도인데 추정 문지에 인접하여 봉돈으로 추정되는 너비 2×2m, 높이 1.2m 크기의 원형상 돌무더기가 있다. 그런데 일반적인 봉수지의 경우 보통 1열에 5개소의 봉돈이 있는데 이 유적의 경우 남아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1열에 5개소가 설치된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2열의 배치 구조였으리라 추정된다. 남동쪽의 문지가 위치한 석축벽은 95×50×32㎝, 50×45×30㎝ 정도 크기의 돌로 7단을 쌓았으며, 높이는 1.9m에 이른다.
북쪽부의 외벽도 7단으로 쌓았고 높이는 2.2m이다. 북동 모서리부는 문지로 되어 있고 동쪽 장벽에 붙여 방형의 돌로써 축대를 쌓은 구조가 남아 있다. 북동 모서리부에 노출되어 있는 동쪽 장벽의 규모를 보면 아래쪽 너비 4m, 위쪽 너비 2.5m의 사다리꼴이며 5단 정도로 축조되어 있다. 이 석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외곽 부분은 비교적 큰 돌로 쌓았고 내부는 작은 돌을 이용하여 채워 넣었다.
[의의와 평가]
잔존 상태가 양호하여 향후 정비와 복원이 필요한 유적으로 조선 시대 봉수 체제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생각된다. 1997년 12월 31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8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