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0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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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口碑傳承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영순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말로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노래·말들의 총칭.
[개설]
구비 전승이란, 민속 전승에서 물질 전승·행위 전승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일반 민중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것이다. 구비 전승은 구비 문학과 지식 전승으로 나눌 수 있다. 구비 문학은 이야기[신화·전설·민담 등 설화]와 노래[민요·무가·판소리], 말[수수께끼·속담]로 구분되며, 민간 신앙·금기어·민간 의료 등은 오래 축적된 지식 전승이다.
천안 지역은 역사적으로 마한과 백제의 땅이었으며, 고려 왕건 등의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이 축적된 곳이다. 또한 전라도·경상도·충청도와 서울을 잇는 천안 삼거리라는 교통의 특수성 때문에 문화가 어울려 소통·전파되어 구비 전승이 풍부한 곳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한국학 중앙 연구원의 『한국 구비 문학 대계』 조사에서는 누락된 채로 급속하게 대도시화·공업화하면서 그 온전한 모습을 추적하지 못한 지역이기도 하다.
천안은 역사성을 띤 설화와 지역성을 띤 민요를 중심으로 수수께끼·속담 등 구비 문학과 민간 의료·민간 신앙·금기어 등 지식 전승이 조사·보고되었다. 무가·판소리·탈춤은 아직 보고된 바가 없다. 대체로 설화와 민요를 제외하고는 도드라지게 독특한 내용보다는 보편적인 내용이 주를 이룬다.
[천안 삼거리-오가는 나그네의 사연]
설화 중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역사적 전설이나 지명 유래담, 인물 전설이다. 그중에 천안 삼거리와 능수버들에 얽힌 전설은 가장 활발히 전승되고 전국적으로도 알려진 이야기이다. 수많은 군상들이 만났다 헤어지니 갖가지 사연들이 들리고 퍼진다. 그중에 천안 삼거리 길거리에 죽 늘어져 있는 능수버들과 「천안 삼거리 흥타령」 민요의 유래담, 배경 설화로 알려진 몇 가지 이야기들이 있다. 「객줏집 능수 아가씨와 어느 선비의 사랑」, 「전쟁에 나가는 아버지와 어린 딸의 이별과 재회」, 「사촌 형제들의 급제, 혼인 후의 재회」, 「삼거리 기생과 사랑에 빠져 과거를 놓친 선비」 등과 같은 이야기이다.
1933년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의 「능수버들」 희곡이나 1949년 「천안 삼거리」 소설 등에는 능수 아가씨의 사연이 보이고, 1958년 최상수(崔常壽)의 『한국 민간 전설집』에는 사촌 형제들의 급제와 우여곡절 끝에 한 혼인담 및 재회 이야기가 보인다. 이를 보면 여러 이야기가 혼재되어 전승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 문헌이나 신문 기사들에는 대부분 객줏집 능수 아가씨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박 선비와 능소 아가씨」 전설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이야기는 현재도 계속 재창작·각색되어 전승되고 있으므로 「박 선비와 능소 아가씨」 이야기는 천안을 대표하는 천안 삼거리 전설이라 하겠다.
[마한과 백제의 기억과 역사의 자취]
천안은 마한 목지국의 땅이었다고 한다. 또한 백제가 들어서며 첫 도읍을 정한 곳이었고, 고려 태조 왕건이 전략적 요충지라고 생각하여 천안부를 설치하고 운영하여 후백제 정벌의 총지휘소로 삼았던 곳이다. 그뿐 아니라 전쟁 때는 군인들이 지나가거나 싸우는 격전지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역사는 고스란히 민중에게 전설로 남았다. 「남산 아기장수와 마한 건국」은 마한의 건국 시조 이야기로 직산면 남산에서 아기장수가 태어나 주변의 인재들을 모아 마한을 건국하였다고 했다. 성공한 아기장수 유형이다. 반면에 목천면에서는 「허 장군과 용화사」처럼 한쪽 날개가 잘린 채 살아가다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에게 쓰임을 받지 못하자 자살한 아기장수 유형 설화도 있다. 이 전설에는 마한에 대한 향수와 임진왜란 때의 아쉬움이 반영되었다.
「왕건과 태조산」 전설은 고려 태조가 천안의 진산[한 고을을 보살피는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인 왕자산에 올라 그곳이 삼국 통일을 할 곳이라고 예견하여 왕자산에서 태조산으로 개명하였다는 내용이다. 백제 관련 전설들도 지역민들 사이에서 생생히 전승되고 있었다. 「위례성의 용샘」, 「백제왕이 단식하며 전쟁한 위례성」 등이 그것이다.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는 직산」, 「직산 조씨의 시조는 온조 대왕의 신하」, 「심나 장군·소나 장군의 최후」 이야기에서는 자부심과 함께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그런가 하면 이름 없는 민중의 이야기도 전승되고 있다. 정유재란 때 청나라 군사도 이기지 못하는 용맹한 왜장이 있었는데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더니 표창 하나로 왜장을 물리쳤다는 「일본 장수를 표창으로 잡은 의인」 설화가 있다. 현상금도 거절한 의인은 가족의 원수를 갚은 평범한 민중이었다.
우리가 먹는 인절미의 기원 설화인 「팥떡 판관 우덕화」는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가는 길에 새로운 음식으로 인조의 입맛을 사로잡은 어느 판관 이야기이다. 박문수의 묘소가 있는 천안에서는 어사 박문수 이야기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 「병천장과 박문수 묏자리」, 「어사 박문수와 산신령」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신화가 기억되는 곳-단국장 할아버지]
신화성은 퇴색했으나 민담으로 전승되는 창세 신화가 있다. 「단국장 할아버지」 신화는 단국장 할아버지가 하늘과 땅, 해와 달을 만들고 인간에게 언어를 주어 동물과 구별되게 하였으며 인간 사이에 천륜과 인륜을 만들어 위계질서를 만들었다느는 내용이다. 창세기 또는 문화 창조 신화의 성격을 지닌 보기 드문 자료이다.
「이 빠진 산 유래」는 배가 산꼭대기에 걸려 움푹 들어가 이 빠진 것처럼 되었다는 대홍수 설화의 흔적을 보여 준다. 마을 당신 본풀이(堂神本풀이)[당굿을 할 때 당신(堂神)의 유래를 풀이하는 소리]의 성격을 지닌 「죽어서도 고을을 지킨 원님」 이야기는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선한 목민관을 바라는 백성의 염원이 담겨 있다. 「흑성산 오뉘 힘내기」는 남매의 대결을 보여 주는 민담으로 모계 사회 신화의 흔적이 보인다.
[주체적인 민중의 모습과 긍정적 시각-여성]
역사와 신화 등 과거로의 추억만 전승되지 않았다.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상을 보이는 민담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여성과 아이로 대변되는 가장 낮은 민중의 또 다른 모습이다. 「중국 황후가 된 정 진사 딸」은 조선에 자신의 배우자가 될 만한 인물이 없음을 알고 여우의 술수를 역이용하여 중국 황후가 된 이야기이다. 변신, 택부, 도술, 지감 등 여러 화소가 결합되어 여성 이인담(異人談) 또는 여성 영웅 소설의 특성을 보이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개가한 열녀」는 「열불열녀(烈不烈女)」 설화와는 다른 유형의 이야기로, 현대적 열녀의 모습과 이를 수용하는 민중의 긍정적 시각이 드러나 있다. 「두 남자를 살린 두꺼비상의 여인」은 복 많은 대감 며느리가 자신을 쫓아낸 본남편을 살리는 「복 많은 며느리」와 같은 부류의 이야기이다. 「장기 잘 두는 며느리」는 내기 때문에 파산하기 직전인 집에 어느 처자가 자청해 시집가서 시아버지에게 장기를 가르쳐 잃어버린 재물을 되찾고 집안을 일으킨다는 주체적이고 지혜로운 여성의 모습을 그린다. 「음흉한 목사 골려 준 아낙네」도 이방 아내를 탐내는 목사를 지혜롭게 물리치는 여성 이야기이다. 「사또 아들의 명판결」은 어린이의 지혜를 다룬 아지(兒智) 설화로 사회 기득권층의 무능력을 비웃는 향유층의 인식이 보인다.
[구비와 문헌의 교차-계층 간의 소통]
구비 설화는 전승되다가 식자층에 의하여 문헌 설화로 정착되거나, 때로는 문헌 설화가 구비로 다시 구전되는 등 서로 넘나들고 소통한다. 「도둑을 감복시킨 홍기섭」이나 「원수 갚으러 아들로 태어난 구렁이」, 「애들에게 들킨 부부 생활」, 「고부 사이 좋게 한 아들」,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지혜로운 처 덕분에 공신이 된 이기축 이야기인 「도끼 정승 원두표」 등은 조선 후기 야담집들이나 1920년대 재담집 등 여러 문헌에 수록되어 전해졌다. 이런 이야기들은 소화로 혹은 효행담으로 남성·여성 채록자들에 의해 생생하게 채록되었다. 문헌과 구비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또한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비슷한 내용의 설화들이 천안에서도 똑같이 보이는데, 「빈대 절터 이야기」나 「여우 구슬」, 「혼쥐 이야기」, 「뉘 복으로 사느냐」, 「해님 달님 이야기」, 그리고 그 밖의 풍수 설화 등이다.
[노랫가락이 넘치는 곳-천안 삼거리 흥타령]
천안의 민요는 1984년 『천원군지』와 1988년 하주성의 『천안의 옛 노래』, 1987년과 1997년 『천안시지』 등에 보고되었다. 1996년에는 천안 문화원에서는 「(흥타령의 고장) 천안의 소리」라는 제목으로 비디오테이프를 제작하였다.
하주성은 천안의 민요를 「천안 삼거리」와 농요, 의식요, 기타 민요 등으로 구분하였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천안 삼거리」 혹은 「천안 삼거리 흥타령」으로 불리는 민요이다. 1950년에 신태삼이 『천안 삼거리 흥타령』을 세창 서관에서 출간하였으니 이른 시기에 「천안 삼거리」 민요는 천안을 대표하는 민요로 전국적으로 소개된 셈이다.
「천안 삼거리」 민요는 음악상으로는 경기 잡가로 흥겹고 신나는 가락이다. 남녀상열지사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의식이나 노동이 수반되지 않는 유희요로 노래 자체의 즐거움을 목적으로 한다. 독창이나 제창으로 불리며 노래 중간중간에 ‘흐응, 흥’ 하며 흥을 돋우는 구절이 들어가기에 「흥타령」이라고도 한다. 지나가는 과객들의 피곤함과 시름을 흥으로 승화시킨 민요이다. 오래전부터 속요로 불리어 오다가 1920년대에 전문적인 소리꾼에 의해 불리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천안 지역은 넓은 평야와 보가 많아서 농요가 풍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도시화·공업화·기계화로 점차 농지가 줄어들어 가면서 많이 소멸되었을 것이다. 「모내기 소리」, 「논매기 소리」 등의 농요는 그 사설에서 천안 사람들의 잘살아 보겠다는 희망적이고 낙천적인 세계 인식이 드러난다. 의식요로는 「상여소리」, 「달구질소리」, 「고사 덕담」, 「삼재풀이」 등이 채록되었다. 하주성은 1987년 천안 문화원에서 펴낸 『천안의 옛 노래』에서 농요나 의식요는 부르는 이의 개인적인 특성은 드러나지만 뚜렷한 지역 특성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오락요로는 삼거리의 특성상 과객의 연희 노래가 많이 유입되고 또 발달되었다고 한다. 무속의 「제석거리」 가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노랫가락인 「창부 타령」, 「청춘가」 등에는 천안 사람들의 정서가 깃든 사설을 붙였다. 특이한 것으로는 「꽃노래」와 「장타령」인데, 「꽃노래」는 양귀비·백일홍·봉선화·분꽃·국화 등을 들어 그 특징과 인간사를 비유하는데 꽃마다 사설이 다양하다. 「장타령」은 창법이 독특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