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8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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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福長 |
이칭/별칭 | 중수(仲綏),송담(松潭),일운 거사(一雲居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종식 |
출생 시기/일시 | 1546년 - 이복장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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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30년 - 이복장 사망 |
정려 | 이복장 정려각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매성리 |
성격 | 효자|의병장 |
성별 | 남 |
본관 | 수안(遂安) |
대표 관직|경력 | 의병장 |
[정의]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의병장.
[가계]
본관은 수안(遂安), 자는 중수(仲綏), 호는 송담(松潭) 또는 일운 거사(一雲居士)이다. 참판을 지낸 이영견(李永肩)의 고손자이고, 승지 이익령(李益齡)의 증손자이다. 할아버지는 사도시 직장을 지낸 이생은, 아버지는 양양 도호부사를 지낸 이주국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동생인 이인장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아들인 이성준 또한 문학과 덕행이 있어서 도동 서원장이 되었다. 손자인 이번(李潘) 역시 효자로서 정려되었다.
[활동 사항]
이복장(李福長)[1546~1630]은 아홉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병이 나자 사당에서 쾌유를 빌었고,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넣어 회생시키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목천 동쪽인 병천면 도원리의 작성산에서 성벽을 수비하였는데, 10여 일 동안 왜적과 싸워 수백의 적군을 무찔렀다. 이와 관련해서는 까치들이 홀연히 무리를 지어 산을 뒤덮어 왜적들이 놀라 달아났다 하여 ‘작성(鵲城)’이라는 산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한편 이복장은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지역 유림을 설득하여 죽림 서원(竹林書院)을 창건한 뒤 초대 서원장이 되었다. 죽림 서원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한강(寒崗) 정구(鄭逑)·후천(朽淺) 황종해(黃宗海)를 배향해 오다가 1676년(숙종 2)에 ‘도동 서원(道東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복원되지 못했다.
[묘소]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도원리 작성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선조 때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숙종 때 정려를 내렸는데,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매성리 작성산 아래 정려각이 있다. 정려각에는 이복장의 정려와 함께 손자인 이번의 정려가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