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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37
한자 日帝强占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6년 3월 - 일제 강점기 산남 의진에 박용운과 박문선이 참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7월 - 일제 강점기 청도 각남면의 유생 최한룡의 창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4월 - 일제 강점기 운문면의 유생 윤만파의 창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 일제 강점기 운산 친목회와 간친 교육회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4월 - 일제 강점기 청도군 국채 보상 의연회 조직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 일제 강점기 청도군 7개 지역 만세 시위운동과 독립 청원 운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1925년 - 일제 강점기 독립군 자금 모집·제공한 다물단 사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1년 - 일제 강점기 청도면 고수동 군용 열차 전복 의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3년 - 일제 강점기 청도면 유호리 동진회의 항일 독립운동

[정의]

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경상북도 청도 지역의 역사.

[개설]

일제 강점기는 일반적으로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를 말한다. 물론 1905년 통감부 설치 이후 일본의 대한 제국에 대한 보호 통치도 사실상 식민 지배와 다름없다고 보고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 지배 기간을 40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1905년부터 1910년까지는 비록 보호국이라는 형태로나마 대한 제국의 주권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는 국권을 강탈당하는 1910년 8월부터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고 한국이 독립되는 1945년 8월까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제 강점기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 방식에 따라 1910년대 무단 폭압 정치, 1920년대 이른바 문화 정치, 1930년 이후 1945년까지 일본 군국주의의 대륙 침략 정책을 수행하는 전시 체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한편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응하여 1910년대는 만주 지방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독립 전쟁기였고, 1919년 3·1 운동을 펼치는 전단계로서 민족적 저항기이기도 했다. 1920년대는 일제의 문화 정치에 대응하여 민족 협동 전선을 구축하는 민족 해방 운동기였으며, 1930년 이후는 대륙 침략 정책의 일환인 한반도 병참 기지화 정책 및 한민족 말살 정책에 대응하여 조국 광복에 목표를 둔 시기였다.

[행정 구역의 변천]

청도군은 1895년(고종 32)에 지방 관제를 23부로 개정할 때 대구부 관할군의 하나인 청도군이 되었다. 1896년 8도 체제로 정비될 때 경상북도 청도군이 되었으며, 상읍내면·차읍내면·상북면·차북면·상남면·하남면·상동면·중동면·용산면·종도면·적암면·동일위면·동이위면·외서면 등 14면으로 이루어졌다. 그 후 1906년 지방 제도가 정비될 때 대구부로부터 풍각면·각북면이 청도군에 이속되었고, 밀양군 상북면 소속이었던 청도읍 사촌리와 매전면 이토리, 운문면 지촌리·봉하리·정상리, 영천군 관할 구룡정상, 경주군 관할 고이·마일 등이 청도군 관할로 이속되었다. 1910년 청도군의 행정 구역은 청도면·화양면·각남면·풍각면·각북면·이서면·운문면·금천면·매전면·종도면의 10면 126동으로 편제되었다. 1917년 하남면과 용산면이 합쳐져 대성면으로 개칭되었고, 종도면은 1931년 면 개편에 따라 폐면되어 청도군은 9면 126동이 되었다. 그 후 대성면은 1940년 청도면으로 개칭되었고, 1949년 청도읍으로 승격하였다.

[사회 경제]

일제 강점기 청도군은 1905년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일본인의 진출, 그리고 일제의 수탈 정책으로 말미암아 사회 경제적으로 급변하였다. 1912년 토지 조사령(土地調査令)의 공포와 토지 조사 사업의 실시, 농민에 대한 지배 체제의 강화를 위한 농업 단체인 지주회(地主會)·면작 조합(棉作組合)·양잠 조합(養蠶組合), 나아가 수탈 기구로써 농업·산업 단체인 농회(農會)·금융조합(金融組合)·산업조합(産業組合) 등이 조직되었다. 더욱이 1920년 시작된 산미 증식 계획으로 한국 농촌 사회 내지 농업은 일본을 위한 경제 구조로 개편되었다. 결국 한국 농민들은 몰락하여 소작농과 극빈농으로 전락하였고 청도 지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강점기 1917년 청도군의 총 호수는 1만 5631호, 인구는 8만 2309명이었고, 그 중 1만 3895호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농업 경영 형태는 지주 52호, 자작농 993호, 자소작농 9,027호, 소작농 3,957호였다. 그러나 자소작농의 경우는 1917년 64%, 1920년 60%, 1931년 30%로 감소하였으며, 소작농의 경우는 1917년 28.2%, 1920년 31%, 1931년 53%로 증가하였다. 청도군의 경우 자소작농과 소작농의 급격한 분해 현상이 나타났다. 따라서 1920년대 청도 지역의 경우에도 농민들은 지주·소작 관계에 있어서 소작지를 구하기 위한 차지 경쟁(借地競爭)에 시달렸고, 과중한 소작료로 말미암아 생활은 열악한 상태로 전락하였다.

[독립운동]

조선 시대 말 1895년 전개된 전기 의병, 이른바 을미의병 시기 청도 지역의 의병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대한 제국 시기인 1905년 이후 청도인들도 국권 회복 운동으로서 의병 투쟁과 계몽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청도인들의 의병 투쟁은 1906년 3월 영천 지역을 중심으로 결성된 산남 의진에 박용운박문선이 참여하였고, 1907년 이후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청도 각남면의 유생 최한룡운문면의 유생 윤만파가 조직하는 의병 부대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계몽 운동의 경우에도 1905년 이후 계몽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경상북도의 경우에도 중앙의 계몽 운동 단체 지방 지회와 더불어 독자적인 계몽 운동 단체가 결성되었다. 청도 경우에도 독자적인 계몽 운동 단체로서 운산 친목회(雲山親睦會)간친 교육회(懇親敎育會)가 설립되어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한 신교육 구국 운동과 산업 진흥 운동이 전개되었다. 청도군의 신교육 구국 운동의 결과 1907년 7월 당시 모두 9개소의 신교육 기관에 420여 명의 학도가 취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고 있었다. 산업 진흥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국채 보상 운동은 1907년 4월 청도군 국채 보상 의연회(淸道郡國債報償義捐會)가 조직되었는데, 청도 민의소를 장악하고 있던 선각적인 유림들이 이를 주도하였다.

1910년대 청도 지역의 독립운동은 국내외에 걸쳐 전개되었다. 국내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거부했던 유생 성기운(成璣運)김달(金達)이 주목된다. 이들은 간재 전우의 문인으로, 경상도의 다른 지역과 비교된다. 1910년대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했던 이정희(李庭禧), 홍주일(洪宙一), 김유덕(金裕德), 김유경(金裕經), 최태석(崔泰錫), 최태욱(崔泰旭) 등 선각적인 인사들의 활동도 나타난다. 한편 국외 독립운동은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참여했던 예대희(芮大禧)의 활동도 눈길을 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청도군 7개 지역에서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대성면 유호리 만세 시위 운동과 일본인 공격, 운문면의 만세 시위운동과 일본 경찰 구타 응징은 만세 시위가 무력적인 시위로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이 된다. 그리고 유림의 독립 청원 운동에 참여한 유생 김정기(金定基)소눌 노상직심재 조긍섭의 제자로 스승인 노상직의 뜻에 따라 동문들과 함께 독립 청원 운동에 참여하고 서명하였다.

1920년대 청도 출신의 국내 독립운동의 경우, 김유덕신민사(新民社), 이정희조선 독립 운동 후원 의용단, 홍재범(洪在範)대한민국 임시 정부 독립 공채 모집 및 워싱턴회의 독립 청원, 윤병권(尹炳權)의 제2차 유림단(儒林團) 군자금 모집, 김진효(金鎭孝)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다물단(多勿團)의 군자금 모집 등이 주목된다. 국외 독립운동으로는 윤치언(尹致彦)의 진주 청년 친목회, 김인제(金仁濟)의 길림성 군정서 부속 흥업단, 강수영(姜壽永)의 만주 독립운동 등이 주목된다. 국외 독립운동의 경우, 청도인들은 국내에서 이들 단체와 관련을 맺고 군자금과 단원 모집 등을 펼쳤으며, 해외에 망명하여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특히 1924년부터 1925년까지 청도군 운문면 출신의 인사들이 북경에서 조직된 국민당 및 다물단과 연계하여 독립군 자금을 모집, 제공한 혐의로 체포 송치된 다물단 사건이 주목된다. 1920년대 민족 운동으로서 사회 운동은 청년 운동, 사회주의 운동, 신간회 운동, 소년 운동, 소작 운동, 형평 운동 등 각 부문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30년대 이후 국내 독립운동으로 1931년 청도면 고수동에서 일어난 군용 열차 전복 의거와 1943년 청도면 유호리에서 조직된 동진회(東進會)가 만주 독립운동 단체와 기맥을 통하고 항일 독립 운동을 펼친 것, 그리고 대구 사범 학교 비밀 결사 연구회와 다혁당(茶革黨)에 참여한 안강진, 최태석, 이종악 등의 활동 등이 두드러진다. 국외 독립운동으로는 1940년대 일본군을 탈출하여 한국 광복군에 입대하였던 한일근, 김해득, 윤봉갑, 손기달, 김의명, 박종락, 박기수, 반양환, 김원진의 활동이 있다. 1920년대 만주에서 통의부와 의군부, 1930년대 조선 혁명군에 참여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던 박대호와 그의 동생 박영호, 그리고 조선 혁명군 양세봉 장군 휘하에서 항일전에 참가하였던 최운구 등의 활동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청도 지역에서는 1930년대 이후 국민 총동원령[국민 징용령] 반대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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