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4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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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謙窩齋 |
영어공식명칭 | Gyeomwajae |
이칭/별칭 | 월매서당,침류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월매리 31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난아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47년 - 겸와재 중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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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09년 09월 02일 - 겸와재 청송군 향토문화유산 제10호로 지정 |
현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월매리 312 |
성격 | 서당 건축 |
양식 |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관리자 | 영양남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청송군 향토문화유산 제10호 |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월매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서당.
[개설]
월매리에 있는 겸와재(謙窩齋)는 남수(南邃)가 기거하던 곳에 건립한 서당이다. 겸와재는 1700년 전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수의 본관은 영양(英陽), 호는 겸와(謙窩)로 영양남씨 청송 입향조인 남계조(南繼曺)[1541~1621]의 둘째 아들이다.
[위치]
겸와재는 월매리 월매마을 입구 서북쪽 산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변천]
겸와재는 남수가 강학하던 장소에 건립된 정자로 건립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700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겸와재는 후에 제청(祭廳)으로도 사용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주사(廚舍)도 새롭게 마련되었다. 영양남씨 문중의 후학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배웠기에 겸와재를 월매서당(月梅書堂)이라고도 부른다. 이후 퇴락하여 1947년 중건이 이루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중건 당시 남수의 후손 남기락(南基洛)이 작성한「겸와재중건기(謙窩齋重建記)」에 따르면, 18세기 중반 무렵 김용하(金龍河)와 남수의 후손들이 계를 결성하여 겸와재 인근에다 침류헌(枕流軒)이라는 정자를 세운 후 교유의 장소로 활용했다고 나타나 있다. 그러나 ‘침류’라는 편액이 남수가 있던 시절부터 사용된 것인지는 잘 모른다고 하였다.
[형태]
겸와재는 침류헌, 주사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침류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기와집으로, 평면 구성은 앞쪽은 마루를 놓고 뒤로는 방 3칸을 연접시켰다. 침류헌에는 1947년에 작성된 상량문이 남아 있다.
[현황]
겸와재는 2009년 9월 2일에 청송군 향토문화유산 제10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영양남씨 문중의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으나, 대문채와 주사채는 거의 무너지고 침류헌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의의와 평가]
겸와재는 전통적인 서당과 정자의 건축 양식을 계승하여,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