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8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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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炫郁 |
영어공식명칭 | Cho Hyeonuk |
이칭/별칭 | 목산(牧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54년 1월 2일 - 조현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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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조현욱 화목장터 3.1독립만세운동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22년 02월 19일 - 조현욱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조현욱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조현욱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26일~27일 - 화목장터 3.1독립만세운동 |
출생지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성덕댐로 735-8[수락리 468]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성덕댐로 735-8[수락리 468] |
활동지 | 화목장터 3.1독립만세운동 - 경상북도 청송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청송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조현욱(趙炫郁)[1854~1922]은 1919년 3월 26일 화목장터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호는 목산(牧山). 1854년 1월 2일 대구 성당동(聖堂洞)에서 아버지 조경화(趙敬和)와 어머니 경주이씨(慶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나 조명화(趙命和)에게 입양되었다. 1615년 청송 안덕(安德)에서 대구 원대동(院垈洞)에 입향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공신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의 후손이다.
[활동 사항]
조현욱은 1919년 3월 26일 청송군 현서면 화목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조현욱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된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듣고 이때야말로 조선이 독립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먼저 현서면 무계동(武溪洞)의 사돈 신태휴(申泰烋)와 함께 현서면 복동(福洞)[현 안덕면 복리]의 조병국(趙柄國)에게 격문을 보내 궐기를 촉구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에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3월 26일 아침 조현욱은 신태휴, 조병국 등과 함께 마을 사람 50여 명을 이끌고 화목장터로 향하였다. 장터로 가는 도중에도 사람들이 합류하여 시위 군중의 숫자가 늘어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이들이 현서면 화목장터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현서면사무소에는 각 마을의 구장(區長)들과 면내 유지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조현욱은 구장 및 유지들을 만세 시위에 가담하도록 설득하고 종용하니 그 중 일부가 시위 대열에 가담하였다. 현서면 각처의 구장 및 유지들의 호응까지 얻게 된 시위대는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화목장터로 몰려갔다. 오후 1시경, 주변의 군중까지 호응하여 시위대는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현서면 화목주재소(和睦駐在所)의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보 2명은 면장과 함께 총검으로 위협하면서 해산을 강요하였다. 이때 조현욱은 신태휴와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9일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이에 공소하여 5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다시 상고하였다.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귀향하여 암담한 현실에 비분강개하여 ‘정의(正義) 없는 곳에서 살아 있기보다 차라리 정의을 위하여 죽기만 같지 못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벽에는 ‘멱시부연(覓尸釜淵)[시체는 부연에서 찾으라.]’이라 써놓고, 현서면 수락리(水洛里)에 있는 부연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