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1553 |
---|---|
한자 | 鳳覽書院 |
영어공식명칭 | Bongramseowon |
이칭/별칭 | 옥동서원(玉洞書院)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병옥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지국 |
[정의]
1602년 경상도 진보현에 건립되었던 사설 교육기관.
[개설]
봉람서원(鳳覽書院)은 이황(李滉)[1501~1570]을 배향하기 위하여 1602년 경상도 진보현(眞寶縣) 옥동(玉洞)[지금의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병옥리]에 건립되었다.
[위치]
봉람서원은 창건 당시 경상도 진보현의 관내에 있었다. 1602년(선조 35) 정탁(鄭琢)[1526~1605]이 쓴 「옥동서원기(玉洞書院記)」에 따르면 “진성현(眞城縣)[진보현]의 북쪽 10여 리[약 4㎞]에 있는 옥동에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봉람서원이 있었던 옥동 일대는 현재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병옥리로 편입되었다.
[변천]
1600년(선조 33) 이정회(李庭檜)[1542~1612]가 진보현 북쪽 10여 리에 산수가 수려하고 골짝이 깊은 기이한 땅을 얻어 ‘옥동(玉洞)’이라 이름 붙였다. 이정회는 지역 유림들과 상의하여 이곳에 이황을 배향하는 서원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1602년 공사가 완료되고, 9월 정사일[17일]에 위패를 사당에 봉안하였다.
서원의 명칭은 자료에 따라 봉람서원 또는 옥동서원으로 기재하고 있다. 그 이유 역시 「옥동서원기」를 통해 알 수 있다. 기문에 따르면 “마을을 옥동이라 명명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혹은 봉람(鳳覽)이라 하였기 때문에 서원의 편액을 초기에는 봉람서원이라 일컬었다. 그 뒤에 안씨(安氏) 성을 가진 서생이 꿈에 두 노인이 옥동이라 지시해주는 기이한 꿈을 꾸었기 때문에 옥동의 옛 명칭을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비롯하여 『진보현읍지』, 『경상도읍지』 수록 「진보현읍지」, 「경상북도진보군읍지(慶尙北道眞寶郡邑誌)」 등의 읍지류에는 봉람서원으로 기재되어 있다. 봉람서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계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9세기 초반 황희(黃喜)를 봉안하는 경상도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 유생들이 원명도용(院名盜用)을 호소했던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1690년(숙종 16) 사액되었지만, 1871년(고종 8)경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후 지금까지 복원하지 못하였다.
[형태]
정탁이 쓴 「옥동서원기」에 따르면 건립 초기 봉람서원은 묘우 3칸, 당(堂) 4칸, 협실(夾室) 2칸, 재(齋) 3칸, 신주(神廚) 1칸, 유사청(有司廳) 2칸, 창고 2칸, 주사(廚舍)와 주사의 직방(直房)이 모두 4칸이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봉람서원을 통해 조선 후기 진보 지역 퇴계 학통의 존재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