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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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山洞 - 龜巖書院 樂齋 徐思遠-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 492-58[동산동 229]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구본욱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유학자 서사원이 살던 집에 건립한 옛 구암서원.
[개설]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 492-58번지[동산동 229]는 조선 후기 ‘대구 유학(儒學)의 스승’으로 일컫는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이 살던 곳이며 1717년(숙종 44)에 구암서원(龜巖書院)이 건립된 장소이기도 하다. 구암서원은 2003년 북구 산격동으로 이건하였다.
[달성의 동산동 세거]
동산동 옛 구암서원 자리는 서사원의 7대조인 구계(龜溪) 서침(徐沈)이 달성(達城)에서 이주하여 처음 터를 잡은 곳이다. 달성서씨는 원래는 달성에서 대대로 살았는데, 세종 때에 이르러 달성이 말[斗] 모양처럼 우묵하고 주위가 천혜의 요건을 갖추어 외적을 방어하는 성지(城地)로 적합하다고 하여 나라에서 보상을 주고 교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서침은 국가의 보상을 사양하고 대구부 백성이 납부하는 환곡(還穀)의 이자를 한 섬에 다섯 되씩 줄여 달라고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오늘날 가진 자가 먼저 선행을 실천하는 노블레스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침은 달성을 헌납하고 남산의 옛 역참(驛站) 터였던 동산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이후 서침의 후손들은 대대로 동산동에 살았는데 7대손 서사원에 이르러 가장 번성하였고 많은 사적을 남겼다.
서사원의 서형(徐浻)[1524∼1575]은 당시 대구 유학의 1세대인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 등과 깊이 교유하였으며, 서사원이 학문에 종사할 수 있도록 터전을 제공하였다. 대구 유학의 1세대는 1565년(명종 20)에 대구의 북쪽에 연경서원(硏經書院)을 창건하여 강학하였는데, 연경서원은 이후 대구를 학술과 교육, 문화의 지역으로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
[대구 유학의 스승 낙재 서사원]
서사원은 1550년(명종 5)에 태어났다. 자(字)는 행보(行甫)이고 호는 낙재(樂齋)이다. 1566년(명종 21) 17세에 아버지 서흡(徐洽)의 명으로 생원 채응린(蔡應麟)[1529~1584]의 서재인 압로정(狎鷺亭)으로 가서 공부하였다. 채응린은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영향으로 과거를 그만두고 육경(六經)을 연구하며 생애를 마쳤다. 1566년에 수성의 파동 계동정사(溪東精舍)로 가서 진사 전경창(全慶昌)[1532~1585]을 찾아가 만났다. 전경창은 서사원에게 “우리 유가(儒家)의 사업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심양성(存心養性)에 있다”고 하고, 『심경』 1부를 주었다. 그리고 “그대는 모름지기 잘 읽어서 내가 오늘 증정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1573년 24세에 서사원은 생원 정사철(鄭師哲)[1530~1593]을 찾아가 만났다. 정사철은 서사원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고 “그대는 곧 나의 외우(畏友)일세”라고 하였다. 서사원은 26세에 향시(鄕試)에 나아가 장원을 하였다. 1575년 8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하빈(河濱)의 이천(伊川)에 장례하고 시묘를 하였다. 28세에 상기(喪期)를 마치고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나아가 학문을 묻고 가르침을 받았다. 서사원은 아버지의 친구인 향리의 스승 송담 채응린, 계동 전경창, 임하 정사철과 성주의 한강 정구 등에게 두루 가르침을 받았다.
서사원은 향시에 합격한 이후로 문과에 응시하지 않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30세에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이천에 정사(精舍)를 지었다. 서사원은 새벽에 일어나 사당을 배알하고 서실에 나아가 책상을 바르게 하고 서적을 정돈하였으며 “뜻은 하루라도 게을러서는 안 되고, 마음은 한시라도 방탕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후로 서사원의 학문은 날로 성장하였으며 향리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1584년에 스승인 채응린과 1585년 전경창이 세상을 떠나 조문을 하였다. 이로써 대구 유학의 2세대인 낙재 서사원,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 연정(蓮亭) 류요신(柳堯臣), 엄약재(儼若齋) 전춘년(全春年),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태암(苔巖) 이주(李輈) 등이 연경서원을 운영하며 강학을 하였다. 서사원은 1588년(선조 21) 10월 5일에 연경서원을 방문한 대구부사 권문해(權文海)[1534~1591]를 생원 전춘년과 함께 맞이하였다. 1591년 42세에는 연경서원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연경서원] 시에 차운(次韻)을 하였다.
1599년 임진왜란으로 대구향교를 비롯하여 연경서원도 소실되었다. 서사원 등은 왜란이 종결된 후 1599년 대구향교를, 1602년에는 연경서원을 중건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이르러 대구 유학의 2세대는 연경서원에서 통강(通講)을 실시하며 대구 전역의 유생들을 대상으로 교육하였다. 통강의 스승은 서사원과 손처눌이었다. 통강이란 유학의 독특한 교육 방법인데, “경전 등을 스스로 공부한 후 매월 서원에 함께 모여 강(講)[암송]을 하여 스승의 평가를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매월 시험을 보아 평가를 받는 것이다. 이 통강을 통하여 양성된 유학자는 136명이며, 대구 유학의 제3세대이다. 통강은 1605년부터 서사원이 타계한 1615년까지 실시되었다. 당시의 통강을 기록한 『대구유현통강록(大邱儒賢通講錄)』이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대구유현통강록』은 오늘날 학생들의 학적부에 해당한다. 서사원을 비롯한 대구 유학 2세대의 노력으로 대구가 학술과 교육 및 문화의 고을로 거듭나게 되었다.
[임진왜란시 대구 지역의 의병대장 낙재 서사원]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사원의 나이는 43세였다. 서사원은 당시를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2일. 밤에 내가 혼자 연방(蓮房)에서 잠을 잤는데 꿈에 부산첨사(詹事)의 상여(喪輿)가 뜰 안에 들어와 놓이는 것이 보였다. 내가 이에 놀라 잠에서 깨어나 괴이하다는 탄식을 그치지 못하였다. 13일. 아침에 비로소 ‘왜(倭)에 대한 전통(傳通)의 통보가 있었다’는 것을 은밀히 들었다. 잠시 후에 부중(府中)에서 호각을 불어 군사를 불러 모은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다. 나 또한 저절로 불안하여져 부중에 들어가 청하여 성주(城主)를 배알하고 변기(變奇)에 대하여 자세히 들었다.”
서사원의 글에 따르면 서사원은 13일 아침에 왜적이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은밀히 듣고 대구부에 들어가 부사 윤현(尹晛)[1536~1597]을 만나 ‘변기’, 즉 왜적의 침입에 대한 소식을 자세히 들었다. 왜적의 침입에 대한 전통(傳通)[파발]이 부산포에서 이미 각 지역에 전달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사원은 “부산첨사의 상여가 뜰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라는 신비한 이야기를 기록하여 놓았다. 당시에 왜적의 침입에 대한 우려를 많은 사람이 하고 있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염려에 대한 기록은 대구 지역 유학자의 다른 기록에서도 여럿 발견된다.
서사원은 1592년 4월 17일에 동래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19일에 왜적의 선봉이 대구에 들이닥칠 것이라는 소식에 임박하여 서사원은 가족과 함께 팔공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서사원은 21일에 다시 부내 본가로 돌아와 서책을 가지고 가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미 성은 텅 비고 사람들은 피난을 가느라 경황이 없었다고 한다. 또 성내(城內)에서 진장(鎭將)을 보았으나 얼마 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부산포에 도착한 왜적은 8일 후인 1592년 4월 21일에 남쪽 청도의 팔조령을 거쳐 파동으로 들이닥쳤다. 서사원은 22일에 팔공산 매봉[鷹峯]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다 수성의 파잠(巴岑)[파동]과 상동(上洞)에서부터 불꽃이 일어나 왜적이 대구 지역에 들어온 것을 알게 되었다. 서사원은 1592년 5월 15일, 16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5월 15일 노비들이 집과 마을을 엿보기 위하여 내려갔다. 16일 저녁에 노비들이 집에 남아 있던 서책 20여 권을 거두어 왔다. 듣자 하니 큰 집이 모두 타 버리고 오직 대문만이 남았다고 한다. 더욱 참담하게도 1,000권의 시서(詩書)는 내가 반평생 동안 널리 구하여 보배처럼 간직하던 것인데, 하루아침에 연못 속으로 모두 버려졌으니 몹시 상심된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1592년 7월 6일에 이르러 대구 지역의 유림(儒林)들은 팔공산 부인사에 모여 향회(鄕會)[대구유림총회]를 열어 읍내(邑內)와 수성(壽城), 해안(解顏), 하빈(河濱) 등 대구 전역을 20개 구역으로 나누고 향병장(鄕兵長)과 유사(有司)를 두어 의병을 조직하였다. 이 의병을 대구 지역의 의병인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이라고 한다. 서사원은 공산의진군의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서사원은 향병을 모으는 「초집향병통문(招集鄕兵通文)」, 향병이 지켜야 할 규약인 「향병입약(鄕兵立約)」 등을 손수 지었다. 대구 지역이 타 지역보다 의병의 결성이 늦었던 것은 대구가 왜적의 주요 접근로여서 왜적에 일찍이 점령당하였고 후방의 군수기지를 두어 왜군의 감시가 었기 때문이다.
동산동 옛 구암서원은 서사원이 임진왜란을 당할 때 거주하던 집이다. 서사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13일부터 천거를 받아 충청도 청안현감으로 나아간 1595년 9월까지 3년 5개월간 일자별로 기록한 일기를 남겼다. 1593년 1월 1일에서 2월 14일까지 기록이 누락되어 있는데, 15일 일기에서 “종이가 떨어져 이 사이는 기록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서사원은 전쟁 중이던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일기를 남겼다. 서사원의 일기를 통하여 임진왜란 당시 대구의 모습과 전황을 알 수 있다. 서사원의 일기를 『낙재선생일기(樂齋先生日記)』라고 하는데 계명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옛 구암서원 개발]
서사원이 타계하고 50년 후인 1665년(현종 6)에 대구부민들은 환곡의 이자를 감하여 준 서침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연구산(連龜山), 지금의 대구초등학교 서남쪽에 구암서원 숭현사(崇賢祠)[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를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1717년(숙종 44) 동산동에 구암서원이 건립되자 숭현사를 구암서원으로 옮겼다. 구암서원은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는데, 1924년에 복원하였다. 그러나 도시화로 인하여 구암서원 주변이 번잡하여 2003년에 달성서씨 대종회에서 서원을 북구 산격동 연암산(鷰巖山)으로 이건하였는데, 동산동에 있던 서원의 건물과 편액 등은 그대로 두고 강당과 사당 등을 새로 건립하였다. 옛 구암서원 건물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으며, 2021년 11월에 달성서씨 대종회에서는 옛 구암서원의 건물과 대지를 대구광역시와 중구청에 기부하였다. 중구청에는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개발하려고 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