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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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明建設 |
영어공식명칭 | Gwangmyeong Housing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910-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노광 |
설립 시기/일시 | 1978년 2월 - 광명주택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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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979년 3월 - 광명주택에서 광명건설로 개칭 |
해체 시기/일시 | 1983년 - 광명건설 부도처리 |
최초 설립지 | 광명주택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910-1 |
성격 | 건설회사 |
설립자 | 이수왕 |
[정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있었던 주택 건설업체.
[개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구 지역 주택시장에는 주택 건설회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설립되기 시작하였으며, 1977년에 부동산 열풍으로 대구에도 아파트 시대가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이수왕은 1978년 2월에 연립주택을 짓는 광명주택을 설립하였다.
[설립 목적]
1970년대에 핵가족화가 진전되면서 편의성이 좋은 아파트 문화가 생활양식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광명주택은 대구·경북 지역에 연립주택과 아파트를 공급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이수왕은 1977년 부동산 열풍으로 대구에도 아파트 시대가 본격화하자 1978년 2월 연립주택을 짓는 광명주택을 설립하고 급속히 사세를 확장하였다. 1979년 3월에는 도급 순위 268위인 건설회사를 인수하여 ‘광명건설’로 이름을 변경하였으며, 1983년에는 도급 순위를 74위로 올려놓았다. 1980년에 상호신용금고를 인수하여 금융계에 진출하였으며, 1983년 7월에는 단자회사인 광명투자금융을 세워 금융업의 발판을 굳혔다.
광명건설은 경북고등학교와 대구상업고등학교 자리에 고층아파트를 짓기 위하여 학교 부지를 매입하기로 하였고, 경북고등학교에는 44억 원의 계약금과 중도금을 지급하고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에는 6억 원의 계약금을 지급하였다.
광명건설은 건설업종 특성상 여타 산업에 비하여 재무구조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편이었다. 1979년을 정점으로 부동산 경기가 하강하면서 1981년에 극심한 불황이 덮치자 광명건설의 공격적 투자는 무모한 투기로 보였고, 증권시장에서는 ‘광명 부도설’이 나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은행감독원은 광명투자와 광명상호신용금고 등에 대하여 집중적인 감사를 실시하였으나 사고 차원의 거래는 없는 것으로 보고 부도 여부 결정을 주거래은행에 맡겼다.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은 광명그룹이 대구 지역의 유력 기업인 점을 감안하여 처음에는 기업을 회생시킬 계획이었으나 사업 전망이 별로 없다고 판단하여 1983년 11월 4일에 돌아온 광명그룹의 어음수표를 부도처리하고 이수왕 회장을 당국에 고발하였다. 이때 광명건설 등 8개 계열사를 거느린 광명그룹의 부도 총액은 약 800억 원으로 추산된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광명건설의 주요 사업은 연립주택과 아파트 공급이며, 이를 위하여 부동산 매입과 분양 업무도 병행하였다.
[현황]
광명건설은 1978년 2월에 대구시 중구 남산동에서 설립되었으며, 1983년 11월 4일 모회사인 광명그룹이 부도나면서 도산하였다.
[의의와 평가]
1978년에 설립된 광명주택은 설립된 지 5년 만에 8개 계열사로 급성장하면서 신흥 재벌로 성장하였으나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한 자금난으로 광명그룹이 부도나면서 어음결제 기피와 하도급업체의 연쇄 도산으로 지역 경제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