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6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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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再根 |
영어공식명칭 | Park Jaegeun |
이칭/별칭 | 후암(後菴),박재근(朴在根)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세윤 |
출생 시기/일시 | 1881년 4월 15일 - 박재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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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박재근 파리장서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9월 14일 - 박재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9년 - 박재근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도원동 - 대구광역시 달서구 도원동 |
거주|이주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재근(朴再根)[1881~1950]은 1881년 4월 15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도원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파리장서 운동이 전개될 때 유림 대표로 참여하였다. 호는 후암(後菴)이며, 박재근(朴在根)으로도 알려졌다.
[활동 사항]
1919년 3·1운동 당시 유림이 민족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하지 못한 사실에 충격을 받은 김창숙(金昌淑)·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 등의 유학자들은 조선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여러 유학자들의 서명을 받았는데, 박재근도 유림 대표로 장서에 서명하였다. 장서는 김규식(金奎植)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로 하였으며, 이와 별도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러나 1919년 4월 12일 성주의 송회근(宋晦根)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는 바람에 파리장서운동의 전말이 발각되었으며, 이 일로 김용호도 일제 당국으로부터 고초를 겪었다. 박재근은 1950년 9월 14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재근의 공적을 기려 2009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