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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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鏞壽 |
영어공식명칭 | Cho Yongsu |
이칭/별칭 | 산남(山南)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언론인.
[개설]
조용수(趙鏞壽)[1930~1961]는 1930년 4월 24일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에서 조판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4·19혁명 후 민족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혁신계를 대변하는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호는 산남(山南)이다.
[활동 사항]
조용수는 진주에서 진주공립제2보통학교[현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진주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자퇴하였다. 대구 대륜중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한 뒤 대륜고등학교를 다녔다. 1950년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 정경학부에 입학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부산에서 외삼촌인 제2대 국회의원 하만복의 비서로 근무하였다.
조용수는 1951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정경학부 경제과 2학년에 편입하였고, 1953년 재일본한국학생동맹 문화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졸업 후에는 한국거류민단 중앙총본부 차장으로 선임되었다. 1959년에는 ‘조봉암씨 구명청원서명운동위원회’에서 활동하여 한국거류민단 도치키현 부단장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귀국한 조용수는 1960년 7월 29일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사회대중당 후보로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 출마하였으나 3위로 낙선하였다. 1961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族自主統一中央協儀會) 준비위원회에 중앙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으나 2월 28일 탈퇴한 이후 2월 13일 창간한 민족일보사의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민족일보』는 4·19혁명과 함께 다시금 정치권 전면에 나섰던 이른바 '혁신계'의 대변지임을 자임했으며, 하루 3만 5000여 부를 발행할 정도로 국내외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조용수는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직후인 5월 18일 민족일보 사원 40여 명과 함께 연행되었고, 조용수를 포함한 간부 8명이 구속되었다. 5월 19일 『민족일보』는 91호까지 발행하고 강제 폐간되었다, 치안국은 “조용수가 이영근의 지령하에 평화통일 방안을 주장하면서 민족일보는 조총련계로부터 들어온 약 1억 환의 불법 자금으로 발간되어 북한이 지향하는 목적 수행에 적극 활약”해 왔기 때문이라고 기소 이유를 밝혔다.
1961년 8월 28일 혁명재판소 제2심판부에서는 민족일보사건으로 검거된 조용수를 송지영·안신규와 함께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 특수반국가행위에 근거하여 사형을 언도하였고, 1961년 10월 31일 상고심에서도 송지영·안신규와 함께 사형이 확정되었다. 조용수는 1961년 12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용수에 대한 사형 판결을 위법으로 규정하고 국가에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였고, 2008년 1월 16일 서울중앙지법은 조용수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