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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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燕山君墓文石人 |
이칭/별칭 | 연산군 묘 문인석,연산군 묘 석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은선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1년 10월 25일 - 서울 연산군 묘 사적 제362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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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서울 연산군 묘 문석인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N37°39′ 46.4245″ E127° 01′ 07.6411″) |
원소재지 | 서울 연산군 묘 문석인 원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
성격 | 유적지|능묘 석물 |
관련 인물 | 연산군(燕山君)[1476~1506]|거창 군부인(居昌郡夫人) 신씨(愼氏)[1476~1537] |
크기(높이) | 상단 동쪽 217.3㎝|하단 동쪽 198.8㎝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정릉 관리소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서울 연산군 묘에 조성된 문석인.
[개설]
사적 제362호인 서울 연산군 묘는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燕山君)[1476~1506]과 배위(配位) 거창 군부인(居昌郡夫人) 신씨(愼氏)[1476~1537]의 묘이다. 묘역에 조성된 문석인(文石人)은 모두 두 쌍이다. 연산군 묘가 왕릉이 아닌 대군(大君)의 격식으로 조성되었으므로, 문석인도 왕릉에 비하여 규모가 크지 않게 조성되었다. 봉분 위쪽의 문석인과 아래쪽의 문석인이 다른 조형을 보이는데, 좌우로 나누어 조성한 것이라기보다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 조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건립 경위]
연산군 묘의 초장지(初葬地)는 1506년 유배지인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조성되었다가 1513년(중종 11) 연산군의 왕비인 거창 군부인의 청에 의하여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현재의 위치에 대군의 예로 이장하였다. 이후 거창 군부인이 1537년(중종 32) 별세하자, 연산군 묘 옆에 묘를 조성하였다. 따라서 묘 석물의 조성 관습상 현재의 문석인은 1513년과 1537년 사이에 이장 및 거창 군부인 묘소를 조성하는 절차를 거치는 동안 건립하였다고 여겨진다.
[위치]
서울 연산군 묘 문석인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 연산군 묘의 경내에 위치하여 있다. 연산군 묘역에는 여러 묘가 산재하여 있는데, 연산군 묘는 가장 위쪽에 위치하며 문석인 두 쌍 모두 봉분 아래 하계(下階)에 도열하여 있다.
[형태]
두 쌍 모두 복두(幞頭)를 쓰고 공복(公服)을 입은 채 홀을 든 형상이다. 봉분 쪽에 가까운 위쪽의 문석인이 크고 안정감이 있으며, 아래쪽 문석인은 규모가 작고 폭이 좁다. 위쪽 문석인은 어깨가 넓게 벌어지고 얼굴을 뒤로 약간 젖혀 당당한 자세이다. 얼굴의 이목구비는 양감이 통통하고 준수하며 눈동자에는 생기가 있다. 신체는 딱딱한 장방형이지만, 세부적으로는 완만한 신체 곡선을 이루고 있다. 넓은 소매는 두꺼우나 끝단에 둥근 양감을 주었고, 홀을 쥔 손가락의 부드러운 윤곽선과 어깨에서 허리로 흐르는 완만한 곡선은 16세기 전반기의 유연한 조형 감각을 보이고 있다. 위쪽의 동쪽 문석인은 76.2×63.5×217.3㎝ 규모이다.
아래쪽 문석인은 두부(頭部)가 크고 어깨선이 왜소하여 위쪽 문석인에 비하여 신체 비례가 불안정하다. 이목구비의 양감은 또렷하나, 섬세하지 못하고 눈과 입 꼬리가 약간 처져 있다. 그러나 손가락의 유연한 곡선, 옷소매 끝단의 둥근 양감, 뒷면의 잘록한 허리 곡선과 잔여 요대의 유연한 선각 등은 16세기 전반기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아래쪽의 동쪽 문석인은 67.4×62.6×198.8㎝ 규모이다.
[현황]
서울 연산군 묘 문석인은 16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다만 오랜 세월과 풍화로 마모가 많이 진행되었고, 검은 지의류(地衣類) 등의 이물질이 생성되어 짙은 회색으로 변하였다.
[의의와 평가]
서울 연산군 묘 문석인은 조성 연대가 뚜렷하고, 왕실에서 예장을 한 사례로 능묘석물의 기준 작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석인이다. 특히 15세기의 과장된 안면 표현에 비하여 16세기 현실적인 인체의 안면 묘사로 변화된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16세기 전반기의 부드러운 조형 감각을 잘 반영하고 있는 대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