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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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彦經 |
이칭/별칭 | 시보(時甫),동강(東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민정 |
활동 시기/일시 | 1546년 - 남언경 식년 생원시 3등 2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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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이주지 | 남언경 거주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
부임|활동지 | 도봉동부임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
부임|활동지 | 도봉동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
사당|배향지 | 미원 서원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
성격 | 문신|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의령(宜寧) |
대표 관직 | 양주 목사 |
[정의]
조선 전기 도봉 서원 건립을 주도하고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이자 유학자.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개국공신인 남재(南在)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영흥 부사를 지낸 남치욱(南致勗)이다. 형제로 남언순(南彦純), 남언진(南彦縝)이 있다.
[활동 사항]
남언경(南彦經)[1546~?]은 서경덕(徐敬德)과 홍인우(洪仁祐)의 문인으로, 생원과 진사 가운데 육행(六行)을 구비한 사람들이 조정에 천거될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헌릉 참봉이 되었다. 1566년(명종 21) 조식(曺植)·이항(李恒) 등과 함께 발탁되어 지평 현감이 되었다. 1573년(선조 6) 양주 목사가 되었으나 관련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듬해에는 사헌부 지평에 제배되었지만 어머니의 노병에 약 수발을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진정하는 소를 올리고, 이를 허락받아 계속 양주 목사에 머무를 수 있었다.
1575년(선조 8) 지평이 되었는데, 이때 종실을 구타한 서리를 일곱 차례의 형신만을 가하고 방송하자는 건의를 하여 체직되고, 이듬해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이어서 집의, 전주 부윤이 되었으나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난이 일어나자 부윤으로 재직 시 선물에 찬양까지 곁들여 정여립에게 아부하였고 야장(冶匠)을 시켜 군기(軍器)를 만들었다는 탄핵을 받고 추국당하고 하옥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여주 목사, 1593년(선조 26) 공조참의가 되었으나 이요(李瑤)와 함께 이황(李滉)을 비판하다가 양명학을 숭상한다는 이유로 탄핵받고 물러나 양근(楊根)의 영천동(靈川洞)에서 지내다가 67세로 죽었다.
남언경은 양주 목사로 재직 시 조광조(趙光祖)를 기리고자 도봉산 아래에 도봉 서원을 세우고, 사액을 청하기 위해 도성에 혼자 들어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조정에서 뒤늦게 남언경을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우참찬으로 올리고, 그를 초빙하였다. 이에 선조를 만나 조광조를 문묘 종사할 것,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는 조정의 분위기를 쇄신하고 현자를 등용할 것, 변방의 수비를 강화할 것 등의 세 가지를 건의하고 돌아왔다. 그 뒤 다시 도봉 서원에 돌아와 친히 제문을 지어 조광조를 제사 지내고, 이를 기념하여 유생들을 불러 잔치를 열고는 조광조 사당의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남언경은 녹으로 받은 쌀과 관청에서 지급하는 마부(馬夫)와 백직(白直)을 모두 서원에 주어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학문과 저술]
남언경의 학문은 스승 서경덕의 영향을 많이 받아 기(氣)를 상대적으로 중시하였다. 이(理)의 초월성과 무한성을 말하는 이황의 주장을 반박하고, 세계의 본질과 현상을 모두 기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인간의 성(性)에 대해서도 절대적으로 순선한 이를 중심으로 설명하지 않고 기로 설명하려 하여, 도덕적으로 선과 악의 가능성이 모두 있음을 이야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