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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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時烈 |
이칭/별칭 | 성뢰(聖賚),영보(英甫),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남간노수(南澗老叟),교산노부(橋山老父),문정(文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정 |
출생 시기/일시 | 1607년 11월 21일 - 송시열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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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33년 - 송시열 생원시 장원 |
몰년 시기/일시 | 1689년 - 송시열 졸 |
추모 시기/일시 | 1694년 - 송시열 복권 |
추모 시기/일시 | 1694년 - 송시열 매곡 서원·고암 서원·누암 서원 제향 |
추모 시기/일시 | 1695년 - 송시열 문정(文正) 시호 받음 |
추모 시기/일시 | 1695년 - 송시열 용진 서원·화양 서원 제향 |
추모 시기/일시 | 1696년 - 송시열 도봉 서원 제향 |
추모 시기/일시 | 1723년 - 송시열 도봉 서원 출향 |
추모 시기/일시 | 1725년 - 송시열 도봉 서원 재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756년 - 송시열 문묘 배향, 영의정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776년 - 송시열 효종 묘정 배향 |
출생지 | 송시열 출생지 -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
거주|이주지 | 송시열 은거지 -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
거주|이주지 | 송시열 은거지 -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 |
거주|이주지 | 송시열 거주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 1가 5-99 |
외가|처가 | 송시열 외가 -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 |
부임|활동지 | 송시열 강학지 -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 남간정사 |
유배|이배지 | 송시열 유배지 - 경상북도 포항시 |
유배|이배지 | 송시열 이배지 - 경상남도 거제시 |
유배|이배지 | 송시열 이배지 -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
유배|이배지 | 송시열 유배지 - 제주특별자치도 |
묘소|단소 | 송시열 묘소 -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
사당|배향지 | 화양 서원 -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375-3 |
사당|배향지 | 대로사 -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하리 200-1 |
사당|배향지 | 도봉 서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
사당|배향지 | 매곡 서원 -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천천리 |
사당|배향지 | 누암 서원 -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은진(恩津) |
대표 관직 | 좌의정 |
[정의]
조선 후기 도봉 서원에 제향된 노론 산림의 영수.
[가계]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 증조할아버지는 봉사를 지낸 송구수(宋龜壽)이며,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이다. 아버지는 사옹원 봉사를 지낸 송갑조(宋甲祚)이고, 어머니는 선산 곽씨(善山郭氏), 부인은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활동 사항]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의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23세까지 살다가 회덕(懷德)과 서울 명륜동 등지에서 살았다. 어릴 때 아버지가 “조광조(趙光祖)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며 지어 준 시에 ‘도봉산상운(道峰山上雲)[도봉산 위의 구름]’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조광조를 제향한 도봉 서원의 위상과 중요성에 대해 송시열이 일찍부터 알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이후 예학으로 유명하였던 김장생(金長生)과 그 아들인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이이(李珥)의 학문을 매개로 주희(朱熹)의 사상에 침잠하였다. 이러한 그의 수학 경험은 이후 그가 서인, 그중에서도 노론의 학문적 정체성을 정립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봉림 대군(鳳林大君)[효종]의 사부가 되어 깊은 인연을 맺었으나,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이후 10여 년간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리고 사헌부 장령으로 관직에 나아갔으며, 이후 효종과 함께 북벌(北伐)을 논의하며 춘추 의리(春秋義理)를 강조하였다. 또한 윤휴(尹鑴)의 학문이 가진 이단성을 문제 삼아 윤선거(尹宣擧)와 갈등을 빚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때부터 송시열은 서인 노론 계열 산림(山林)[학식과 덕이 높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지내는 선비]의 영수로서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시작하였다.
현종이 즉위한 뒤로 송시열은 이조판서·우의정 등 주요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대부분 거절하고 재야에 은거하면서 공론을 주도하였다. 또한 이때 1·2차 예송을 겪으면서 서인의 예설을 확고히 고수하다가 2차 예송 때 파직되고 포항·거제도로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 영중추부사에 제수되어 입대하고, 이후로도 산림의 자격으로 박세채(朴世采) 등과 함께 조정에서 국정을 논하기도 하면서 주자와 이이에 대한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송시열은 1월에 제주도에 유배되었으며, 6월 서울로 압송되는 와중에 전라도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송시열은 일찍이 조선 성리학 도통의 시작인 조광조를 사모하여 그가 제향된 도봉 서원을 즐겨 찾아 글씨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현재 도봉 서원 입구에 있는 큰 바위에 ‘도봉동문(道峯洞門)’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송시열이 1688년(숙종 14) 6월 5일 이희조(李喜朝)에게 보낸 편지에 “도봉 산길에 남긴 나의 필적이 제현(諸賢)들의 배려에 의하여 새겨졌으나, 뒤에 윤휴와 허적(許積)의 무리가 나를 미워하여 이를 파 버렸다 하는데…….”라는 말이 있으나, 그것이 어떤 글귀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도봉 서원 계곡에 남아 있는 ‘제월광풍갱별전 요장현송답잔원 화양노부서(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 華陽老夫書)[비가 개고 달이 올라 시원한 바람이 다시금 특별히 이어받았도다. 애오라지 거문고를 치며 노래하여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화답하네. 화양노부 쓰다]’라는 시는 송시열이 주희(朱熹)의 시 구절을 쓴 것이고, 이것을 제자인 권상하(權尙夏)가 후에 바위에 다시 새기고 그 옆에 직접 ‘무우대’를 조그맣게 새겼다는 기록을 『송자대전(宋子大全)』과 『한수재집(寒水齋集)』에서 볼 수 있어, 이것을 송시열이 이희조에게 언급한 글귀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송시열은 「도봉 서원(道峯書院)」이라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애삭립동문개(蒼崖削立洞門開)[푸른 절벽 깎아 세운 듯 도봉동 문이 열렸으니]
간수잔원기곡회(澗水潺湲幾曲廻)[도랑물 잔잔히 몇 굽이 돌아왔나]
요순군민당세지(堯舜君民當世志)[요순 군민 만들려는 당시의 뜻을]
묘전공유후인래(廟前空有後人來)[후인들 사당 앞에 와서 기리네]
또한 1668년(현종 9) 조정에서 송시열을 우의정에 제수하면서 사관을 보냈을 때 그가 도봉 서원에 있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송시열과 도봉 서원의 인연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학문과 저술]
송시열의 학문은 철저하게 주희의 학설을 바탕으로 하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서인 학통의 도통을 이은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 주자(朱子)의 학설을 정리하고 연구하는 데에 힘을 기울여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등의 저술을 남겼고, 그 밖에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경례의의(經禮疑義)』·『심경석의(心經釋義)』·『찬정 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朱文抄選)』 등의 저술도 있다. 문집으로 『송자대전』이 있다.
[묘소]
묘는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96년(숙종 22) 도봉 서원에 조광조와 함께 병향(並享)되었는데, 이때 이 문제를 두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송시열의 도봉 서원 향사 문제는 이후 노론과 소론 사이의 정치적 대립과 민감하게 연관되어, 경종 때인 1723년(경종 3)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노론 세력이 조정에서 축출 당할 때 도봉 서원에서 송시열의 위패도 출향되었으며, 영조의 즉위 이후인 1725년(영조 1) 다시 배향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756년(영조 32) 문묘에 배향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776년(정조 즉위년)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여주의 대로사(大老祠)가 송시열을 모신 사당으로 1785년(정조 9) 사액을 받았다. 도봉 서원을 비롯하여 10여 개 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