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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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重九偶遊寧國書院無酒無朋行囊唯乾栗建茶嚼栗煑茶以慰飢甚是寥落 |
이칭/별칭 | 「중구일에 우연히 영국 서원에서 노니는데, 술도 없고 친구도 없고 행낭 속에 오직 말린 밤과 건다(建茶)만이 있으므로, 밤을 씹어 먹고 차를 달여 마시어 주림을 달래노라니 매우 쓸쓸하였다」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6년 - 「중구우유영국서원 무주무붕 행낭유건률건다 작률자다이위기 심시요락」 저자 이항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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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16년 - 「중구우유영국서원 무주무붕 행낭유건률건다 작률자다이위기 심시요락」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18년 - 「중구우유영국서원 무주무붕 행낭유건률건다 작률자다이위기 심시요락」 저자 이항복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629년 - 「중구우유영국서원 무주무붕 행낭유건률건다 작률자다이위기 심시요락」 『백사집』 간행 |
배경 지역 | 영국 서원 - 서울특별 도봉구 도봉동 |
성격 | 한시 |
작가 | 이항복 |
[정의]
1616년 중구일 무렵에 이항복이 도봉 서원에 갔다가 지은 오언 절구의 한시.
[개설]
「중구우유영국서원 무주무붕 행낭유건률건다 작률자다이위기 심시요락(重九偶遊寧國書院無酒無朋行囊唯乾栗建茶嚼栗煑茶以慰飢甚是寥落)[중구일에 우연히 영국 서원에서 노니는데, 술도 없고 친구도 없고 행낭 속에 오직 말린 밤과 건다(建茶)만이 있으므로, 밤을 씹어 먹고 차를 달여 마시어 주림을 달래노라니 매우 쓸쓸하였다]」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이 1616년(광해군 8) 중구일(重九日)[중양절] 무렵에 도봉 서원을 방문하고 느낀 감흥을 적은 한시이다. 이항복이 61세 되던 1616년에 지은 시로, 이즈음 이항복은 거처를 노원(蘆原)에서 망우리 동강 정사(東岡精舍)로 옮겨 기거했다. 이 시는 이항복의 시문집 『백사집(白沙集)』 권1에 수록되어 있다.
이항복의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 또는 백사,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었기 때문에 ‘오성 대감’으로 널리 알려졌고,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과의 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1575년 진사 초시에 오르고, 1580년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병조 판서·이조 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이정구(李廷龜)[1564~1635] 등 당대의 많은 이들로부터 ‘당색에 물들지 않고 공평무사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시문집으로 『백사집』이 전하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구성]
중구일에는 높은 곳에 오르는 ‘등고(登高)’라는 세시 풍속이 있다. 그런데 중구일이 되었건만 높은 산에 오르지는 못할 망정 깊은 계곡에 들게 되었고, 술은 고사하고 차 한 주발 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
소살등고일(笑殺登高日)[우스워라 높은 산을 오르는 날에]
번성입간래(飜成入磵來)[도리어 깊은 계곡에 들어왔네]
나장다일완(那將茶一椀)[어찌하면 차 한 주발을 가지고]
환득주삼배(換得酒三杯)[석 잔 술과 바꿀 수 있겠는가]
[특징]
제2구의 ‘래(來)’, 제4구의 ‘배(杯)’를 운자로 한 오언 절구이다. 측기식(仄起式)으로서 평성(平聲) 회운(灰韻)으로 압운하였다.
[의의와 평가]
「중구우유영국서원 무주무붕 행낭유건률건다 작률자다이위기 심시요락」을 지을 즈음 저자 이항복은 이미 노쇠하였고, 지기(知己)였던 이덕형을 잃었으며, 정치적으로 시련을 겪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이 시에는 그의 쇠한 기운이 드러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거니와 본래 제목을 읽고 나면 시인의 심정을 더 잘 확인할 수 있다. 이항복은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한 후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사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벼슬에서 물러나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인 노원(蘆原)의 촌가(村家)에서 독서를 하며 잠시 기거하다 망우리로 이주하였다. 영국 서원[도봉 서원]은 도성 근교에 있는 데다가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 이래 특히 서인들이 집합하는 서원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시 이곳에 자주 출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