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4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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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死六臣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엄기석 |
개축 시기/일시 | 1679년 - 사육신묘 개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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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 시기/일시 | 1691년(숙종 17) - 사우 조성, 민절서원 건립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2년 5월 25일 - 사육신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 지정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77년 - 사육신묘 성역화 사업 |
현 소재지 | 사육신묘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 191[노량진동 152-3] 사육신묘지공원 |
성격 | 묘역 |
관련 인물 |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김문기(金文起) |
봉분 크기/묘역 면적 | 분묘 4기|묘표 4기|토지 90.4㎡ |
문화재 지정 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1동에 있는 조선 세조대 단종복위운동으로 인해 순절한 사육신의 묘.
[개설]
1456년(세조 2)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거나 자결한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이른바 사육신의 묘이다.
세종대 집현전 학자였던 성삼문·박팽년 등은 수양대군의 왕위 계승을 명백한 찬탈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절의를 세우기 위하여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였다. 1456년(세조 2) 6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를 창덕궁에서 열기로 하였는데, 이 때 성삼문의 아버지였던 무신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임시로 국왕을 호위하는 관직인 별운검(別雲劍)을 맡아 왕의 뒤에서 호위를 하기로 하였다. 복위 세력은 이를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배치하지 않겠다는 결정이 나면서 계획이 뒤틀리게 되었고, 유응부 등은 거사를 강행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성삼문·박팽년 등은 보류하기로 하였다. 이때 복위운동 세력이었던 김질(金礩)이 자신의 장인인 정창손(鄭昌孫)과 세조에게 계획을 시인하면서 단종복위운동은 실패로 끝이 났다.
성삼문·박팽년·하위지 등 주동 세력은 1456년(세조 2) 가장 참혹한 처형 방식인 거열형을 당하였으며, 친자식들도 모두 교형에 처해졌다. 성승·성삼문·이개·박팽년 등은 처형된 후 지금의 사육신묘가 위치한 노량진에 묻혔다고 전해졌다. 이후 1681년(숙종 7)부터 사육신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자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 일대에 묘역이 정비되어 ‘사육신묘’로 불리우게 되었다.
[위치]
사육신묘는 지하철 9호선 노들역과 노량진역 사이에 있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 191[노량진동 152-3] 사육신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
[변천]
현재 사육신묘 자리에는 ‘박씨지묘(朴氏之墓)’, ‘유씨지묘(兪氏之墓)’, ‘성씨지묘(成氏之墓)’, ‘이씨지묘(李氏之墓)’라고 새긴 표석이 있는 4개의 묘가 있었고, 그 뒤편으로 1개의 묘소가 더 있었다고 한다. 이는 박팽년, 유응부, 성삼문, 이개의 묘소와 성승의 묘소로 전해져왔다. 민간에서 구전으로 전해져오던 단종복위운동 세력의 묘소는 조선 후기인 숙종 대에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1679년(숙종 5) 숙종이 노량진에서 군대를 사열하던 중 사육신묘를 정비하고 나무를 심어 보호하였으며, 1691년(숙종 17)에는 묘역 안에 사우(祠宇)를 세워 사육신을 배향하였다. 이듬해인 1692년(숙종 18)에는 사우를 사액(賜額)하여 민절서원(愍節書院)으로 삼았다.
1782년(정조 6)에는 신도비가 건립되어 사육신의 충절을 기렸다. 이후 1977년 사육신묘 성역화 사업 과정에서 유성원과 하위지의 가묘(假墓)를 추봉하여 사육신묘를 갖추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효온(南孝溫)이 『사육신전』을 쓸 때 김문기(金文起)와 유응부를 바꿔 기술했기 때문에 김문기를 사육신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결국 사육신의 범주에 대한 논의는 결론을 짓지 못하였고, 유응부와 김문기의 묘소를 모두 조정하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논란이 지속되자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김문기를 현창하되, 종래의 사육신의 구성은 변경한 바 없다는 의견을 확정하였다.
[형태]
사육신묘는 사육신공원 안에 7개의 묘소로 조성되어 있다. 묘소 외에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의절사와 정문인 불이문, 신도비와 보호각 등이 설치되어 있다. 공원 내에는 사육신의 충절을 소개하는 사육신역사관이 건립되어 운영 중이다.
[금석문]
사육신신도비는 1782년(정조 6)에 건립하였으며, 태학사 조관빈(趙觀彬)이 비명을 찬술하고, 글씨는 당나라의 안진경 글씨를 집자하였다. 사육신묘비는 1955년 서울특별시에서 민절서원의 옛 터에 6각의 형태로 묘비를 건립한 것이다.
[현황]
사육신묘는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사육신공원 안에 조성되어 묘역 앞에 있는 의절사에서 매년 10월 9일에 사육신 추모제향을 올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였던 사육신에 대한 인식이 국왕을 시해하려던 역적에서 충절의 상징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