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5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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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農民生活 |
영어공식명칭 | The Famer's Life |
이칭/별칭 | 농촌통신,개로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원재연 |
설립시기/일시 | 1928년 - 농민생활사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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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시기/일시 | 1929년 6월 14일 - 『농민생활』 창간 |
폐간|종간 시기/일시 | 1942년 5월 - 『농민생활』 폐간 |
속간 시기/일시 | 1953년 6월 - 루츠가 서울에서 『농민생활』을 속간함. 사장은 루츠, 주간 이장춘, 편집국장 한낙원.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8년 4월 1일 - 편집 겸 발행인 조응천이 『농민생활』의 발행소를 서울로 옮김. 다시 폐간된 날짜는 알려지지 않음. |
소장처 |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상도동 511] 숭실대학교 |
성격 | 잡지 |
관련 인물 | 매퀸|모우리[E.M.Mowrye, 모의리]|루츠|조응천|정인과|채필근|이장춘|한낙원 |
창간인 | 매퀸 |
발행인 | 매퀸|모우리[E.M.Mowrye, 牟義理]|루츠|조응천 |
판형 | 제5권12호[1933년 12월] 26.3㎝×18.9㎝|제6권1호[1934년1월] 22.3㎝×14.7㎝|제7권1호[1935년1월] 22.1㎝×15.2㎝|제11권2호[1939년2월] 21.8㎝×15.2㎝ |
총호수 | 미상[1953년 복간된 이후 다시 폐간된 날짜가 알려지지 않음]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일제 강점기에 농촌 선교를 위해 창간한 농업 전문 잡지.
[개설]
『농민생활』은 숭실대학교의 전신인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초대 교장인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매퀸을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하여 1929년 6월 창간한 농업 전문 잡지이다. 1928년 기독교 장로교 총회가 농업 전문지를 창간할 계획으로 ‘농촌생활사’를 신설하고 1929년 6월 14일 월간지 『농민생활』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구의 80~90%가 농민이었던 식민지 조선에서 기독교 전교(傳敎)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농업 전문 잡지를 발간했다.
1905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사립대학인 숭실대학은 일제의 교육법에 의해 대학으로 인정받지 못하자 기독교 장로교 총회는 1925년 전문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낸 후 전문학교로 변경했다. 이어서 전문학교에 농업강습소를 설치하는 등 농촌에 새로운 농사기술을 전파하고 선진 농업국의 경영방식을 보급하기 위한 일환으로 1929년 6월 월간잡지 『농민생활』을 창간하게 된 것이다.
『농민생활』의 초대 발행인 겸 편집인은 창간 당시 숭실전문학교 교장이었던 미국인 선교사 매퀸[George Shanon McCune, 尹山溫][1873~1941]이었다. 매퀸은 이후 7년간 잡지사를 이끌어갔다. 그러나 매퀸 교장이 신사참배 등 친일적 협조를 일체 거부하고 기독교 선교 교육방침을 계속 추진해 나가자 일제는 1936년 매퀸의 교장직을 박탈하고 미국으로 추방했다. 이에 미국인 모우리가 1938년까지 제2대 발행인이 되었고, 루츠[Lutz Dexter Nathaniel, 柳韶][1890~1985]가 1941년까지 제3대 발행인이 되어 기독교 민족주의에 근간을 두고 『농민생활』의 운영방침을 유지해나갔다.
비록 형식적으로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를 잡지의 목차 위나 앞에 게재하고 물자절약을 압박하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잡지의 면수를 줄이는 등 일제에 협조하는 척 했지만, 한글 위주의 국한문 혼용의 문장을 고수하면서 농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한편으로 기독교 선교도 꾸준히 해나갔다. 이에 잡지사 운영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압박은 더욱 강화되었고 1941년 5월에 제3대 발행인 미국인 루츠가 편집인 겸 발행인을 그만두고 조선을 떠나야 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7개월 전이었다.
그러자 조응천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들이 편집과 경영의 권한을 물려받아 그동안 거부했던 창씨개명도 수용하고 잡지 명칭도 전시대비 노력동원을 연상케 하는 『개로(皆勞)』로 변경하여 잡지 운영을 이어 가고자 했다. 그러나 곧바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다. 해방 후 1953년 6월 제3대 발행인 루츠가 다시 『농민생활』을 속간했으며 1968년부터는 조응천이 경영권을 물려받아 잡지 발행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결국 알 수 없는 시점에 폐간되고 말았다.
[창간 경위]
1897년 10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베어드[W.M.Baird, 裵偉良][1862~1931]가 설립한 숭실학당은 1900년경 본격적인 중등교육기관으로 발전했고,1905년 고등교육기관인 대학부를 한국 최초로 설립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는 교육법에 의해 숭실대학을 사립 대학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숭실학원은 1925년 기존의 대학부를 문과 하나만 전문학교로 변경 등록하여 총독부의 인가를 얻었다. 이로써 숭실전문학교로 새롭게 출발했다.
숭실학원은 기독교적 개교 이념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농촌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농업기술 교육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면서 전교활동을 강화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숭실전문학교에 농업강습소를 설치했다. 동시에 기독교 장로회 총회는 1928년 농촌부를 신설하고, 1929년 농민신문을 발행하기 위해 평양에 신문사인 농민생활사를 창립하였다. 이에 더하여 숭실전문학교에 부설된 농업강습소의 교수진들을 동원하여 지면을 통해 농민들에게 근대적 영농기술을 가르치고 농촌사회에 기독교 전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려고, 6월 14일 농업 전문잡지인 『농민생활』을 창간하였다.
초대 발행인 겸 편집인은 초대 숭실전문학교 교장이었던 미국인 매퀸이 맡았고, 이와는 별도로 잡지사 운영을 위해 사장 정인과(鄭仁果), 편집부장 채필근(蔡弼近) 등 전문 경영진을 임명했다. 그러나 영업부장은 매퀸이 겸했다. 그러다가 1931년 숭실전문학교의 농업강습소가 농과로 승격함과 동시에 그동안 『농민생활』의 실제 편집과 집필 등에 주된 역할을 수행해오던 농업강습소[농과]가 소속된 숭실전문학교로 잡지사의 운영권이 옮겨갔다.
[형태]
『농민생활』 창간본의 구체적 서지사항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처음에는 국판[B5] 크기 40쪽으로 발행했다가 나중에 4·6배판으로 변경했다. 1면을 3단으로 나누고 세로쓰기 형태로 편집했다. 한글을 위주로 하되, 필요한 용어는 국한문을 혼용했다. 1933년 12월 간행한 제5권 12호는 26.3㎝×18.9㎝ 크기로 국한문 42쪽이고, 1934년1월 간행한 제6권1호는 22.3㎝×14.7㎝ 크기로 국한문 71쪽이다.
[구성/내용]
『농민생활』을 통해 개간, 비료, 작물, 양계, 양봉, 과수, 채소 등 농업 제분야에 걸친 서구의 과학적 영농기술을 가르치고, 근대적 농업경영과 관련된 제반 경험담을 수록하였다. 또 새로운 품종들을 소개하며 그 재배 방법을 아울러 자세히 설명했다.
한편, 『농민생활』은 농업전문 잡지이지만 기독교 전교를 창간 취지로 하였기 때문에 잡지의 앞, 뒤, 중간에 광고나 알림의 형태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입교의 과정을 소개했고, 성경과 기타 교리서적도 가끔 소개하고 판매 홍보했다. 또한 시, 수필, 논설,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기독교적 문학작품도 게재하여 독자들에게 간접적으로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였다.
『농민생활』 창간호[1929년 6월]의 머리말에서는 전세계적으로 농민들이 농업을 경시하고 도시로 떠나는 이농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장로회 조선 총노회가 농민을 지도하고 구제하기 위해 농촌부를 설치하고 『농민생활』을 창간하게 되었다고 창간의 취지와 배경을 간략히 소개했다. 머리말에 이어 「조선 농민의 각성」[프랜시스 오 클락], 「우리의 세간살이」[법학사 정재윤], 「조선농민의 장래」[농학사 루츠], 「농민구제책과 기독교 전도」[경북노회 간사 이석락], 「피폐해져 가는 우리의 농촌경제」[농학사 윤정호] 등 여러 인사들의 계몽적 논설이 실렸고, 조선장로교회 총회장 염봉남과 각지를 대표하는 김석창[선천], 최득의[신의주], 백승건[황주], 최준익[기양], 최지화[안주], 김경노[강서], 최정필[황주], 김승곤[평양], 최환진[광양], 한몽연[기양] 등의 창간 축사가 이어졌다.
한편, 농업과 관련된 전문적 강좌로 「과수병에 대한 관리」[숭실전문 교수 김상근], 「비료 이야기」[농학사 김응룡], 「부업 양계에 대하여」[강병식] 등의 기사가 실렸고, 서구의 선진농업을 소개하는 「덴마크 농촌소식」[한기자], 시조 문학작품 「농인의 희망」[김은용] 등이 수록되었다.
창간호의 기사들 중에서 전문성과 유용성이 두드러진 농업기술과 관련된 기사로서, 후일 제3대 발행인 겸 사장을 맡게되는 미국인 루츠의 「조선농민의 장래」를 거론할 수 있다. 루츠는 조선 농촌의 비료사용 현실과 그 문제점을 분석하기 위해 숭실전문학교 농업강습소가 전국에서 400개의 견본을 채취하여 검사한 결과 토지의 배수, 윤작 비료사용, 수확 등과 관련된 상관성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어느 농민이 300평의 토지에서 밀 10두를 수확하고 더 많이 거두기 위해서 20두의 비료를 주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고 호소하므로, 그 토양을 검사해 보았더니, 인산이 매우 부족했으므로 퇴비 외에 과린산석회 5관만 더 주게 되면 20두 이상의 수확이 무난할 것이라고 하는 처방을 보내주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1935년 7월 1일자 『농민생활』 7~8월 합동특대호[제7권 7~8호]는 본문이 무려 150쪽이나 되어 일제 강점기 때 나온 어떤 농민잡지보다 분량이 월등히 많았다. 농업기술 전문강좌에 속하는 「백채 재배법」[문의빈], 「비료 배합법」[박해평], 「자돈분만일 아는 법」[정태화], 「농업경제학강화」[이평] 외에도 다양한 장르별 문학작품이 실렸다. 「아낭형의 전설」[장마서], 「뫼고 할머니」[강조원], 「홋닥새」[송선걸] 등 전설과, 「조그만 희망」[김덕재], 「감자꽃」[강소천], 「정든고향」[홍고혼], 「농촌은 좋은 곳」[한죽송], 「아가야」[김요섭], 「종달새」[우성익] 등 시 작품이 실렸다. 또 단편소설 『모반자』[한인택], 장편소설 『철민』[한적선] 등이 실렸고, 「내가 본 도시」[GGG], 「도시인의 우월감」[박영실], 「도시인의 농촌인식」[김봉준], 「도시로 떠나지 말자」[한죽송], 「자존심」[박생], 「보수주의 타파」[H생], 「조선금융조합론」[최응상], 「농민이촌의 소고」[나윤찬], 「농가개혁론」[김지현], 「인생다운 인생」[박영실], 「협동, 호조, 절제」[문규벽] 등의 논설도 실렸다. 이외에도 「갈마 모범부락 소개」[장시화], 「홍원 용천의 모범부락」[이종천] 등 모범부락 소개와 각종 탐방기, 「납량지하의 제일신」[홍고혼], 「농촌생활의 일일」[김명길], 「고집이 강한 농민」[박영수], 「귀향잡언」[박신오] 등의 농촌수필 등 매우 다양한 기사가 월간지에 실렸다. 일제 강점기 기독교 문학을 전공하는 한 연구자에 의하면, 『농민생활』은 여러 다양한 장르의 문학 작품 중에서도 특히 시, 시조, 동시, 동요 등을 막라하는 시문학 작품들을 통해 농촌의 서구화와 근대화를 추구했다고 평가했다.
[변천과 현황]
『농민생활』 1929년 창간호의 판권장을 보면 미국인 윤산온(尹山溫), 곧 매퀸이 발행인이고, 인쇄소는 평양 신창리 170번지에 있는 일신활판소, 발행소는 서울 홍파동 15번지에 있는 농민생활사로 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인쇄소와 발행소가 각각 평양과 서울로 서로 다른데, 이는 당시 『농민생활』의 발행주체인 기독교 장로교의 중심이 사실상 평양과 서울로 이원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강제로 폐간되기 직전인 1941년에 이르면 인쇄소와 발행소가 모두 평양으로 일원화된다. 발행사인 농민생활사는 평양부 신양리 39번지에 있었고, 인쇄소인 기신사(紀新社)도 평양부 신양리 150번지에 있었다. 그후 발행소는 1953년 6월 복간될 때 서울이었으나, 1956년 5월부터 충청남도 대덕군으로 이전하였고, 1968년 4월 조응천이 편집 겸 발행인이 되면서 다시 서울로 환원하였다.
『농민생활』은 기독교 장로교 총회의 지도 아래 전국 각 노회와 지역 교회를 통해서 보급에 주력한 결과 1932년 9월에는 발행부수가 3만 8500부에 이르렀으나, 일제의 간섭과 탄압으로 1939년에는 7,000부로 줄었다. 그러나 장로교 측의 보급노력에 힘입어 1941년 5월 약 1만부로 회복되었다. 1942년 5월경 제3대 발행인 루츠를 마지막으로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들이 모두 본국으로 추방된 직후에는 폐간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부편집인 조응천이 집필, 편집진 중에서 유일하게 형식적이나마 ‘조일응천(曺一應天)’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하고, 잡지의 제목을 바꾸어 노력 동원을 연상케 하는 『개로』로 하는 등 일제 당국의 요구에 일정 정도 타협하면서 속간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해방 후 1953년 6월 복간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32년에 비하면 1/7로 줄어든 5,500부를 발행하며 부수를 회복하지 못했다.
『농민생활』 1939년 12월호를 보면 이미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황국신민의 서사」가 잡지의 앞부분 목차 바로 위에 한자가 많은 일본어로 제시되어 있다. 1941년 12월에 발발한 태평양전쟁 몇 개월 전에 간행된 『농민생활』 1941년 2월호에도 라디오를 이용하여 성경 공부를 하는 고등통신성경과의 학생을 모집하는 광고가 실려 기독교 전교라는 잡지 본래의 목적은 여전히 관철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또 만주 지역인 연길현 용정에 경화촌지국(慶和村支局)을, 평안도 용강군에 진지지국(眞地支局)을 신설하는 등 잡지 보급을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강요로 『농민생활』의 지면(誌面)이 축소되는 경향이 거세지고 있다. 편집인 이진화(李鎭華)가 “‘농민과학’[조응천] 등 3건의 원고가 게재되지 못했음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는 의 편집후기에 남긴 언급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당시 기사의 제목과 내용을 보면 식민지 조선 사람들에 대한 일제 당국의 착취와 압박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사례로 발행인 루츠가 「비료난과 그 대책」이라는 서두의 특별기고를 통해서 농민들에게 닥친 물자결핍이라는 난관을 극복할 방안을 조언해 주고 있으며, 과일의 가지치기로 비료를 절약하고, 인분과 초목재 등 대체 비료 사용법을 소개하는 본문을 통해서 전시에 대비한 농촌과 농민의 어려운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1941년 5월호에는 미국인 선교사로는 마지막 발행인인 루츠가 고별사를 통해 잡지의 편집과 재정의 부담 등을 모두 부편집인에게 위임한다는 기사와 새로 편집인이 된 조응천이 그동안 루츠 선교사는 잡지의 발행 책임자로서 농학에 박식하고 실천궁행하는 지도자로서 조선농업계의 공헌자라고 찬사를 보내며 노고를 위로하는 기사가 지면의 앞뒤에 차례로 게재되기도 하였다. 조응천은 편집 겸 발행인 취임사를 통해서 첫째, 증산보국을 위한 부업 기술의 지도에 노력하고, 둘째 건강보국을 목표로 위생란을 확대 강화하여 질병 예방에 주력하며, 셋째 토양분석을 토대로 비료사용을 합리화하며, 넷째로 잡지의 본문 문체는 간단하고 쉬운 한글을 계속 사용하되, 때로 국한문을 혼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통해서 보면 당시 『농민생활』은 보국(報國)을 내세워 일제의 시정에 일정 정도 형식적 타협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한글 사용을 계속 고수하는 등 민족주의 색채를 유지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이러한 민족주의 성향 때문에 조응천의 속간 시도는 결국 성공하지 못하여 1942년 5월 폐간 당하고 만 것으로 여겨진다.
[의의와 평가]
『농민생활』은 일제 강점기 평양과 서울을 근거로 했던 기독교 장로회가 창간한 농업 전문 잡지이자 기독교 선교지이다. 특히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한글 사용 원칙을 고수하는 등 숭실학원이 추구했던 민족주의와 기독교 전교의 원칙을 견지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간당한 기독교 민족잡지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농촌 계몽과 농업 부흥을 위해 전문적 농사기술과 영농지식을 보급한 농민잡지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