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2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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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地藏菩薩-念願-彌陀寺 |
영어의미역 | Mitasa Temple, a santuary built for the Asia's largest Kshitigarbha imag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민식 |
[개설]
가섭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동남향 골짜기에는 음성군에서 가장 큰 사찰이자 가장 많이 알려진 사찰, 미타사가 자리 잡고 있다. 충주와 청주를 잇는 국도 36호선으로 가다 보면 동양 최대 크기의 지장보살입상이 금방 눈에 띈다. 관광객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미타사로 옮겨지는데, 마치 지장보살의 중생 구제에 의 강렬한 염원이 사람들을 미타사로 이끄는 것 같다.
미타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한 문헌 자료가 없어 천년 고찰인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거대한 높이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미타사 지장보살의 따뜻한 눈길, 모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誓願)이 담긴 그 눈길은 현대인의 지치고 고달픈 삶을 위로하고 있다.
[미타사의 기원과 재창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문헌 자료나 유물 자료는 전혀 없다. 절 입구 암벽에 조각된 마애불이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어 고려시대에 사찰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시 절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조선시대에는 이미 폐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타사 측에 의하면 옛 절 이름이 ‘유룡사’였다고 하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미타사 측에서 제공한 미타사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1300년 전인 630년(진덕여왕 8)에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창건 이후 고려시대 도선국사와 조선시대 무학대사·사명대사 등 여러 대덕 스님들에 의해 몇 차례 중건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각성대사가 의병 3천 명을 모집, 항마군으로 출정하여 호병(胡兵)을 물리친 공을 세워 나라에서 크게 중수하였으나 1742년(영조 18) 화재로 폐허가 되었다.”
현재의 미타사는 1964년 봄 수덕사의 비구니 명안이 찾아와 절을 다시 짓기를 염원하면서 수도에 정진하자, 마을 사람들이 미타사 창건 기성회를 조직한 데서 유래되었다. 1965년 4월에 흙벽돌을 쌓아 8칸 규모의 목조 와가의 불당을 세웠다. 1979년에는 사역(寺域)을 크게 확장하고 주전으로 극락전을 건립하고 그 서쪽에는 삼성각을 세웠다. 최근에 요사 1동과 식당, 납골당 등을 건립하였다.
[미타사에 있는 전각과 모셔진 부처님들]
1. 극락전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 겹처마 다포집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1979년에 건립되었다. 극락전에는 1965년에 제작한 석가여래좌상과 1980년에 제작한 아미타여래좌상·관세음보살상·대세지보살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아미타극락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걸려 있다.
2. 삼성각
삼성각은 극락전 서쪽에 동향으로 세워져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1979년에 건립되었다. 삼성각 안에는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삼성각 중앙의 벽에는 칠성탱화를 걸고 그 좌우에 산신탱화와 독성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삼성각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고려 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머리 부분과 양손이 파손되어 없어진 채 옛 절터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머리와 양손을 복원하여 삼성각에 봉안한 것이다.
3. 석조여래좌상
삼성각에 봉안되어 있는 석불이다. 일석의 화강암으로 조성하였는데 현재 파손이 심하여 머리 부분과 양손을 시멘트로 보강하였는데 매우 조잡하다. 비록 졸속하게 보수하였지만 양 팔의 형태로 보아 아미타정인을 취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법의는 통견으로 의문을 매우 두껍게 표현하였는데, 대체로 좌우 대칭을 이루고 무릎 아래까지 덮고 있다. 그리고 배면에까지 의문을 조각하였다. 상체는 꼿꼿하여 당당한 인상을 주지만 하체부의 조각은 매우 약식화되어 균형미를 상실하였다. 실측치는 전체 높이 96㎝, 머리 높이 30㎝, 어깨 너비 40㎝, 무릎 높이 13㎝, 무릎 너비 56㎝이다.
4. 마애여래입상
미타사 입구의 서쪽 암벽에 동향으로 조각된 마애불이다. 수직의 편편한 자연 암면에 불신(佛身)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마애불 주변을 정으로 쪼아 깎아냄으로써 입상을 정조(整調)하였다. 불상의 머리 부분과 어깨 부분만 양각으로 처리하고 그 이하의 양손과 허리, 하반신 부분은 음각선으로 불상의 윤곽만을 나타냈다.
민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높은 머리 묶음, 부피 있는 네모난 얼굴, 눈·코·입의 처리 등에서 형식화가 뚜렷이 진행되고 있다. 머리에는 두건형의 관모를 썼으며 상호는 원만자비의 상으로 비만한 편이다. 양 눈썹에서 코까지 연결되는 선은 뚜렷하나 두 눈과 입은 선명하지 못하고 양쪽 귀는 크고 뭉툭하지만 정교하지는 않다.
법의는 통견으로 어깨 부분의 조각이 뚜렷하지 않으나 양 팔에서 늘어뜨린 옷 주름이 V자 형을 이루었고 복부 이하에서는 6조 평행의 사선으로 표현하였으며 허리 아래 부분에는 하향하는 직선 무늬가 희미하게 보인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주름은 사선으로 흐르고 있다. 오른손은 밑으로 내리고 왼손은 들어 가슴 앞에 댄 모습으로 당시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 수법이 도식화한 느낌을 준다. 평판적인 신체, 직선적인 윤곽, 여기에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 옷 주름, 옷자락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 거구의 불상 양식을 계승한 고려 중기 또는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흉부의 균열이 심하여 1995년에 보수한 바 있으며, 1982년 12월 17일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었다. 실측치는 바위 높이 435㎝, 바위 너비 606㎝, 불상 높이 405㎝, 머리 높이105㎝, 어깨 너비 124㎝, 귀 길이 45㎝이다.
5. 세존진신사리탑
부처님 열반 후 그 사리를 대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1940년 미얀마의 만다래이힐 사원으로 옮겨졌던 것을 5과를 분봉 받아 한국에 모셔오게 되었다고 하며 이후 다시 3과를 미타사에서 분봉 받아 1992년에 대광명진신사리탑을 조성하였다.
6. 지장보살입상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꾀하고 모든 중생이 백팔참회(百八懺悔)를 통해 다생겁래(多生劫來)의 업장을 없애고 성불하기 바라는 뜻에서 높이 108척(41m)으로 동양 최대 크기로 조성되어 2000년 10월 4일 점안되었다.
7. 기타 시설
선실은 극락전 앞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7칸, 측면 2칸 반, 주심포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1980년에 건립하였다. 요사는 선실 서쪽에 1965년 토담집으로 건립하였다가 1996년 정면 7칸, 측면 2칸 반의 시멘트 블록 기와집으로 지었다. 미타사 입구에 있는 선다원은 미타사에서 운영하는 찻집으로 각종 차를 음미할 수 있다. 특히, 솔잎을 이용한 송곡차가 유명하다.
미타사에서 조성한 납골공원으로 자연가정납골공원이 있다. 북에는 현무를 상징하는 가섭산의 오색비단 장막이, 동에는 좌청룡, 서에는 우백호가 엎드려 지켜주고 앞에는 구룡연과 남주작의 여의주가 뚜렷해 예로부터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재밌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 할지라도 미타사가 있는 행정 구역은 비산리인데, 비산리는 비석이 산처럼 많은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미타사에 흐르는 지장보살의 염원]
지장보살은 “지옥 중생을 다 구할 때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을 세운 보살로 유명하다. 지장은 브라마나 시대부터 일장(日藏)·월장(月藏)·천장(天藏) 등과 함께 별의 신으로서 신앙되었는데, 불교에서는 6세기 초 외족의 침입으로 북인도의 불교 파괴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널리 유포되었다고 한다.
중국에 전해지면서 염마시왕(閻魔十王) 신앙과 결합되고, 말법(末法) 사상이 활기를 띠면서 지장을 통한 구제를 열망하는 신앙으로 발전하였고, 관음 신앙과 더불어 중요한 민간 신앙이 되었다. 지장보살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하고 있다. 그 중 특히 지장보살이 서원을 세우게 된 계기에 관한 대표적인 이야기로는 두 가지가 있다.
먼 옛날, 서로 이웃한 나라의 두 임금은 깊은 우정을 나누었지만, 그들 나라 백성들은 여러 가지 악한 일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이를 측은히 여긴 두 임금은 여러 가지 방편을 베풀어 백성들로 하여금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려고 노력하였고, 항상 선(善)을 행하여 모범을 보였다.
어느 날 두 임금이 각각 원(願)을 세우게 되었다. 그 중 한 임금은 “빨리 깨달음을 이루어 널리 이들 무리를 남김없이 제도하리라.”라고 하였고 다른 임금은 “죄고(罪苦)에 빠진 이들을 먼저 제도하되, 그들 중 안락을 얻지 못하거나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는 자기 있으면 나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노라.”라고 하였다. 성불하여 중생을 구하겠다는 왕은 수행 끝에 일체지성취여래가 됐고, 성불을 원하지 않은 임금은 지장보살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지장보살본원경』에 있다. 아득한 옛날 사자분신구족만행여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였다. 한 장자의 아들이 그 부처님을 우러러 보며 “아! 저 거룩한 모습 속에는 천만 가지 복이 모두 갖추어져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깊은 감동을 느낀 장자의 아들은 부처님께 여쭈어 보았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행원(行願)을 이루셨기에 지금과 같은 훌륭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나이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였다. “이와 같은 몸을 이루고자 하거든 마땅히 오랜 세월 동안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해주어야 하느니라.” 그 말을 들은 장자의 아들은 “지금부터 미래의 세상이 다할 때까지 아무리 오랜 겁이 될지라도, 죄업 때문에 고통 받는 육도의 중생에게 널리 방편을 베풀어, 그들을 모두 해탈하게 한 다음 저 자신이 불도를 이루겠나이다.”라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그가 바로 지장보살이 되었다.
이처럼 지장보살의 근본 정신은 중생의 해탈에 있다. “서둘러 성불하여 부처님과 같은 거룩한 모습을 갖추겠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다할 때까지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고 그들을 모두 해탈시킨 다음, 그 후에 부처가 되겠다.”는 것이다. 지장보살이 널리 사랑받는 것은 이러한 중생을 위한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파지옥(破地獄)의 대보살’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하는데, 이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진하여 지옥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장보살은 많은 조각으로 조성되고 많은 그림으로 그려졌다. 지장보살의 형상은 천관을 쓰고 가사를 입었으며, 왼손에는 연꽃을 쥐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취하고 있다. 또는 왼손에 연꽃을 쥐고 오른손에 보주(寶珠)를 든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육환장(六環杖: 고리가 여섯 개 달린 석장)을 짚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졌다.
미타사의 지장보살도 이 육환장을 들고 있다. 미타사의 지장보살이 조금 다른 것은 고리가 2개라는 것이다. 지장보살이 육환장을 짚고 있는 이유도 중생 구제를 위해서이다. 육환장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하늘 등 육도(六道)를 상징한다. 지장보살의 육환장은 육도를 윤회하는 수많은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옥문이 한 해에 한번 열린다는 우란분절에 육환장으로 지옥문을 연다고 한다. 구세구난(救世救難) 뿐 아니라 뭇 생명에 대한 자비와 가르침을 상징하는 각별한 의미가 육환장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