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5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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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平黙 |
영어공식명칭 | Kim Pyeongmook |
이칭/별칭 | 치장(穉章),중암(重菴),겸산(兼山),문의(文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성환 |
출생 시기/일시 | 1819년 - 김평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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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43년 - 김평묵, 이항로·홍직필의 문하에서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852년 - 김평묵, 유중교와 『송원화동사합편강목』 편찬 |
활동 시기/일시 | 1881년 - 김평묵 전라도 지도로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891년 - 김평묵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00년 - 김평묵 규장각 제학에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974년 - 김평묵 경현단에 배향 |
수학|강학지 | 한포서사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신천리 |
사당|배향지 | 경현단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산70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청풍 |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경현단에 배향된 조선 후기~개항기 학자.
[가계]
김평묵(金平黙)[1819~1891]의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자는 치장(穉章)이고, 호는 중암(重菴)·겸산(兼山)이다. 할아버지는 김도홍(金道弘), 아버지는 김성양(金聖養)이다. 어머니는 장수 황씨(長水 黃氏)이다.
[활동 사항]
김평묵은 5세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3세에는 경서(經書)를 이해하였다고 한다. 1843년(헌종 9)에는 이항로(李恒老)와 홍직필(洪直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52년(철종 3) 홍직필이 죽은 뒤로는 이항로의 학설을 따라 심즉리(心卽理) 설에 기울어졌고, 같은 문하의 유중교(柳重敎)와는 『대학』의 명덕(明德)을 이(理)로 보느냐 기(氣)로 보느냐의 차이로 논쟁을 하였다. 1852년(철종 3) 춘천의 신천(新川)에서 강회를 열었고, 유중교와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을 편찬하였다. 1860년(철종 11)에는 가평 조종(朝宗)의 밤골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조정에서 이항로를 동부승지에 임명하였는데, 이때 스승과 함께 상경하였다. 프랑스 군대가 물러난 후에는 다시 귀향하였고, 가평군 설악면 신천리에 한포서사(漢浦書社)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1876년(고종 13)에는 홍재구(洪在龜)·유인석(柳麟錫) 등의 청으로 척화소(斥和疏)의 초고를 지었다. 1880년(고종 17) 선공감 가감역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881년(고종 18) 이만손(李晩孫) 등 영남 유생 1만여 명이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리자 후원하였고, 7월 다시 척양(斥洋)·척왜(斥倭) 상소를 초안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전라도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1882년(고종 19)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풀려났다가, 9월 대원군의 실각으로 다시 지도로 유배되었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풀려났다.
[학문과 저술]
김평묵의 저서로는 『중암문집(重菴文集)』, 『중암별집(重菴別集)』, 『중암고(重菴稿)』, 『근사록부주(近思錄附註)』, 『학통고(學統考)』, 『천군편(天君編)』, 『대곡문답(大谷問答)』, 『치도사의(治道私議)』, 『해상필어(海上筆語)』, 『경장문답(更張問答)』, 『붕사잡록(鵬舍雜錄)』, 『해상록(海上錄)』, 『삼강문답(三江問答)』, 『구곡문답(龜谷問答)』, 『벽산심설연원(壁山心說淵源)』, 『척양대의(斥洋大義)』, 『남정기문(南征記聞)』, 『우촌수담(雨村手談)』, 『노강수록(鷺江隨錄)』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김평묵은 1900년(광무 4) 규장각 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1974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장석마을에 있는 경현단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