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1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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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激戰地中部地域戰略的要衝地-加平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인재 |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휴전이 되기까지 가평군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서 지속된 남한과 북한의 전쟁.
[개설]
6·25전쟁 당시 가평 지역은 북방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경로 중 하나로서 전략적 가치를 지닌 중요한 방어지역이었다. 일찍이 가평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각 세력이 각축하던 곳이었고, 이러한 전략적 특성은 6·25전쟁 당시 서울을 향해 남진하던 북한군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북한군의 입장에서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서울로 남하하는 진격로는 크게 최단 경로인 서부전선의 파주-의정부, 그리고 중부전선의 화천-춘천-가평을 경유하여 서울의 동·남측으로 우회하는 통로 등의 두 가지였다. 따라서 가평은 6·25전쟁 중 서울을 목표로 전개된 대규모 공세에서 서울 북방을 향한 주공을 보조하는 공격, 즉 조공의 통로로 사용되었다.
[국군 제6사단의 가평지구 전투(1950. 6. 25.~1950. 6. 28.)]
6·25전쟁 중 가평에서의 첫 전투는 개전 당일인 1950년 6월 25일에 있었다. 당시 동부전선을 담당한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2사단은 남침 개시와 함께 개전 1일차에 춘천을 지나 가평을 점령하고, 2일차에 가평-서울 간 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한강 이남에서 서울을 방어하는 국군 주력부대의 후방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한편 국군은 제6사단 7연대가 춘천-가평 일대를 방어하는 가운데 연대 예하 제3대대를 화천-춘천 방면, 제2대대를 양구-춘천 방면에 배치하였다. 당시 가평에는 제3대대 제10중대[중대장 하상도 대위, 당시 제3대대장 대리]가 목동리와 가평에 위치하였고, 제11중대는 대대예비로서 춘천에 주둔 중이었다. 당시 가평에는 남북 도로가 발달하지 않고 다만 사창리-시룬고개-신당리와 신포리-고수령-홍적령-목동리-가평으로 통하는 두 개의 계곡 통로만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의 이동을 감제하기 좋다는 장점과 함께 우군부대의 지원을 받기가 곤란하다는 단점이 함께 존재하였다. 또한 당시 국군 제3대대는 예하의 제9·10·11·12중대 중 춘천 북쪽의 38도선에 배치된 제9중대와, 춘천 정면의 화력지원을 담당하던 제12중대[대대 화기중대]가 대대의 지휘에서 이탈함으로서 오직 2개 중대만을 가지고 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병력적인 문제를 함께 갖고 있었다.
북한군의 첫 남침 포격이 개시된 지 1시간 뒤인 6월 25일 05시, 가평 북방의 고수령에서 제10중대의 경계초소와 남하하는 북한군의 제2사단 6연대 2대대 병력과의 첫 교전이 일어났다. 이들은 연대 주력이 춘천을 공략하는 동안 고수령과 지암리의 국군을 섬멸하고 가평을 점령할 기도를 가지고 있었다. 북한군은 오후 늦게까지 홍적령-목동리-가평으로 이어지는 접근로를 이용해 우회 공격을 감행, 가평 동북쪽 10㎞ 지점의 하남종까지 진출하였다. 국군의 제10중대 제1소대는 09시, 홍적령의 주진지에서 적을 저지하다가 적의 우회공격을 피해 16시에 본대에 합류하여 지연전을 지속하였다. 19시에는 춘천에서 제11중대가 합류하여 맴내를 점령함으로서 가평 방어선에 가세하였다.
6월 26일 07시, 북한군은 춘천과 가평에서 동시에 공격을 재개하였다. 제10·11중대를 한 데 모은 제3대대(-)는 때마침 육군본부에서 전황 파악을 위해 파견한 제1기갑연대 제1중대 소속 1개 장갑차소대의 사격지원을 받으며 북한군의 공격을 지연시키고, 14시부터 가평 북쪽의 434고지와 옥녀봉으로 후퇴하였다.
6월 27일 07시에 제10·11중대는 북한군의 기습 공세를 한 차례 방어하였다. 그러나 만 이틀 동안 지속된 전투로 인하여 극심한 피로와 탄약부족 문제가 발생하였고, 본디 유사시 가평으로 증원되어야 할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8연대가 가평군에 도착하였다가 작전명령의 변경으로 6월 27일 03시에 철수해버리자 인접 우군부대도 없이 전투를 감내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결국 제3대대(-)는 434고지와 옥녀봉에서 철수하여 천연 요새에 가까운 보납산으로 철수하여 방어전을 지속하고자 하였으나, 북한군과의 접촉을 단절할 수가 없어 본대와의 연락이 가능한 상색리까지만 병력을 철수시켰다. 그러던 중 대대는 12시 경 육군본부로부터 원주로 철수하여 연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대대는 청평을 거쳐 횡성으로 후퇴함으로서 가평지구 전투가 일단락되었다. 북한군 제2사단은 같은 날 늦은 오후가 돼서야 가평 근교까지 진출하였으며, 다음날인 28일 14시 경 가평을 점령하였다.
가평지구 전투에서 국군은 불과 2개 중대 규모의 병력만을 가지고 적의 연대급 기동을 3일동안 지연시키는 전공을 거두었으며, 춘천지구 전투에서의 전공과 함께 북한군 제2군단의 개전 초 기동계획에 치명적인 차질을 가져왔다. 한강 이남에서 국군의 후방을 포위하려던 북한군의 의도는 결국 적시에 달성되지 못하였으며, 국군이 한강 방어선에서 재편성을 마치고 북한군의 주공을 7일간 지연시킬 수 있게 되었다.
[영연방 제27여단의 가평 전투(1951. 4. 23.~1951. 4. 25.)]
가평전투는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 당시 사창리 지역에서 국군 제6사단의 전선을 돌파한 중공군 제20군이 가평 방면으로 돌파구를 확대하자 영연방[영국연방] 제27보병여단 예하 영국군 미들섹스연대(Middlesex Regiment) 제1대대·캐나다군 패트리샤공주 캐나다경보병연대[PPCLI: Princess Patricia’s Canadian Light Infantry] 제2대대·호주군 왕립호주연대(Royal Australian Regiment) 제3대대 등 3개 보병대대가 뉴질랜드 제16야전포병연대(16th Field Regiment, Royal Regiment of New Zealand Artillery)의 화력지원 아래 3일 동안 가평천 일대에서 중공군의 침공을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1951년, 1월 유엔군의 재반격으로 서울을 빼앗기고 퇴각을 거듭하던 공산군은 4월에 이르러 북한군의 제3군단과 중공군의 제39·40·64군 등 새로운 부대를 전선에 투입, 임진강에서 서울 방면으로 향하는 ‘춘계공세’[중공군 제5차 공세]를 준비하였다. 같은 시기 중서부전선에서는 미국의 제9군단과 제10군단이 춘천과 가평으로 진출하여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가평에는 제9군단의 예비인 영연방 제27여단이 배치되었다.
제27여단은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28일, 본래 주둔지였던 홍콩에서 한반도로 파병된 영국군 최초의 파병 지상군이었다. 여단은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되어 낙동강 방어선 전투, 반격 북진작전 등에 참가하여 이미 수많은 공적을 세운 바 있었다. 파병 당시 제27여단에는 영국군 미들섹스연대 제1대대와 아길앤서덜랜드하이랜더연대(Argyll and Sutherland Highlanders) 제1대대 등 2개 대대만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9월에 도착한 호주군과 12월에 도착한 캐나다군과 뉴질랜드군이 각각 합류함으로써 여단 편제에 걸맞은 병력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가평전투에 앞선 4월 21일, 사창리 서측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제6사단은 중공군의 공세 의도를 사전에 제압하기 위해 와이오밍선(the Wyoming Line)[전곡-연천-철원]까지 전선을 북상시키기 위한 공격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 날 시작된 중공군의 전면 공세에 부딪혀 23일 가평까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사창리전투]. 더구나 뉴질랜드 제16야전포병연대는 같은 날 야간, 국군 제6사단을 엄호하면서 퇴각을 위해 미들섹스연대 제1대대의 철수 엄호를 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중공군의 공세가 급박해짐에 따라 도리어 미들섹스의 철수를 뉴질랜드 포병이 엄호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가평천을 따라 퇴각하는 국군 제6사단을 목격한 제27여단은 즉시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여단장 버크(Brian Burke) 준장은 국군과 함께 철수하던 뉴질랜드 제16야전포병연대와 영국군 미들섹스연대 제1대대와 함께 수덕산에 배치하고 호주군 왕립호주연대 제3대대·캐나다 PPCLI 제2대대를 가평천을 따라 그 남쪽에 배치하였다. 여단의 역할은 가평에서 국군 제6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중공군의 추가 침입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4월 23일 늦은 밤, 죽둔리 일대의 호주대대와 내촌 동측의 PPCLI 제2대대가 중공군 제118사단 제354연대의 강력한 야습을 받았다. 밤새 계속된 중공군의 공세는 24일 낮까지 계속되었으며, 공세에 밀려 17시 경 호주대대가 철수를 하는 상황에서도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의 강력한 화력으로 가평천을 도하하려는 중공군의 기동을 차단하는 등 중공군의 공격 기세에 큰 타격을 입혔다. 23~24일의 치열한 공방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중공군은 대열을 재정비하여 25일 02시 캐나다군 진지를 향해 재공격을 가했으나, 이 역시 캐나다군의 유인에 뒤이는 강력한 포격으로 격멸되었다. 이틀에 걸친 전투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은 중공군은 25일 새벽에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으며, 이로서 가평전투는 제27여단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영연방 제27여단은 자신들의 5배 규모가 넘는 중공군 1개 사단의 공세를 가평에서 저지함으로서 국군 제6사단의 붕괴를 막고 중공군의 춘계공세 전체 계획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가평에 침입한 중공군이 조기 제압됨에 따라 유엔군의 전선이 양단되는 것을 막고, 가평에서만 1천 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강요하여 공세 초기의 관성을 무력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당시 전투의 주역이었던 캐나다군과 호주군은 당시의 유공으로 미국 대통령부대표창을, 뉴질랜드군은 한국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 가평전투는 지금까지도 캐나다군과 호주군, 뉴질랜드군의 6·25전쟁 파병기간 중 가장 명성이 높은 전공으로 기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