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887
한자 朴春實
이칭/별칭 박동식(朴東植)/박충실(朴忠實)
분야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가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5년 10월 13일연표보기 - 박춘실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박춘실 의병 거병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박춘실 고창곡에서 일본군과 교전
활동 시기/일시 1909년 4월 - 박춘실 거창군 북상면 월성, 산수, 병곡, 당산 마을에서 활약
활동 시기/일시 1909년 5월 - 박춘실 일본 경찰에 체포
몰년 시기/일시 1914년 6월 3일연표보기 - 박춘실 자결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박춘실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박춘실 생가 -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임평리 1227 상백암
묘소 박춘실 묘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3
성격 의병장
성별
대표 경력 의병장

[정의]

근대 개항기 거창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장.

[개설]

박춘실(朴春實)[1875~1914]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5년간 경상남북도 및 전라북도 등지를 횡행하며 일본군과 60여 회 교전 또는 습격 등을 감행하여 수백 명을 살해하고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1909년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14년 감옥 벽을 파괴하고 100여 명의 동지들을 탈옥시킨 후 자결하였다.

[가계]

박춘실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활동 사항]

박춘실의 본명은 박동식(朴東植)이다. 전라북도 장수 출신으로, 원래 한학을 공부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애국심이 남달랐던 박춘실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무주, 장수, 진안에 격문을 배부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이를 보고 모여든 의병 52명을 이끌고 용담 구봉산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후 덕유산으로 거점을 옮겨 선봉장으로서 무주, 진안, 장수, 안의, 거창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쳤다. 1906년 가을에는 문태수 의진과 연합하고 장수 및 무주 일대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1907년 무주 고창곡에서 문태수와 함께 일본군에 대항하여 교전하였고, 1908년에는 무주 구천동에서 일본 헌병대와 교전하였다. 1909년 4월부터는 거창군 북상면 월성, 산수, 병곡, 당산 마을 등지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1909년 5월 8일에 박춘실은 문성(文城)의 동북쪽 산중에서 130여 명의 의병과 더불어 주둔하고 있었는데, 도리카이[鳥飼]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 함양 수비대와의 교전으로 의병 13명이 순국하고 박춘실은 체포되었다.

이후 1909년 7월 17일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14년 전주 형무소를 탈옥하려다 실패하였다. 그 후 대구 형무소로 이감되자 벽을 파괴하여 100여 명의 동지들을 탈옥시킨 후 본인은 자결하였다.

[묘소]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박춘실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박춘실에게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