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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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泉歷史-源流甘文國 |
영어의미역 | Gammunguk, the Root of Gimcheon's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송기동 |
[감문국은 누가, 어떻게 세운 나라일까]
삼국 시대 이전에 성립되었던 대부분의 소국이 그러하듯 감문국(甘文國) 또한 1700여 년의 풍상 속에 대부분의 유적이 훼손되고 멸실되어 그 흔적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다. 따라서 감문국의 실체에 접근하는 방법은 제한된 사료(史料)와 전설, 문학 작품 등에 나타난 한정된 관련 자료를 통해 유추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감문국이 성립될 수 있었던 데는 먼저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정착 생활과 농업의 발달에 따라 인구가 급증하고, 동제(銅製) 무기의 출현 등으로 위계질서가 생겨나면서 조직 구성원을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는 우두머리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렇듯 수장을 중심으로 정치적 결사체가 생겨나고 분쟁이 잦아지면서 세력을 확장해 가는 가운데,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북방의 선진 문물을 보유한 위만조선 유민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 보다 세련된 정치 결사체인 초기 국가 형태의 소국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북방 유민의 일방적인 지배와 점령이라기보다는 한반도 남부 지방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토착민들에게 선진화된 문화적 충격을 주어 세련된 형태의 정치 결사체인 읍락 국가 형성을 촉진시켰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990년 공단 부지 조성 과정에서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 변에 위치한 구성면 송죽리 일대에서 신석기와 청동기, 철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층위적(層位的)으로 형성된 취락 구조가 발견되면서 감천의 중하류에 위치했던 감문국의 건국 주체와의 관련성이 새삼 주목 받기도 했다. 구성면 송죽리 감천 변에서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주거지와 유물이 대량 출토되고, 같은 감천 유역인 개령면과 감문면 일대에서 동시대의 대표적인 묘제(墓制)인 고인돌이 집단으로 발견되고 있는 것은 좋은 예이다.
당시의 정황과 관련해서 중국의 사서인 『후한서동이전(後韓書東夷傳)』에는 ““마한재서 유오십사국 진한재동 십유이국 변진재진한지남 역십유이국 범칠십팔국(馬韓在西 有五十四國 辰韓在東 十有二國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凡七十八國)”)”, 즉 “마한에는 54국, 진한에는 12국, 변한에 12국, 모두 78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3세기 후반에 저술된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 한조(韓條)에는 3세기 중엽 영남 지방에는 진한계 12국과 변한계 12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사료를 통해 볼 때 주조마국(走漕馬國)과 감로국(甘路國)을 변한(弁韓)에 속한 김천 지역의 소국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감문국은 기원전후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많은 읍락 국가 중 하나다. 감문국의 건국 주체는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에 걸쳐 감천 유역에 산발적으로 집거(集居)하던 토착민들이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의 전환기 무렵 인구의 증가 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생산 기반을 가진 감천 중하류인 개령·감문 일대로 이동해 주변의 읍락을 통합, 흡수해 형성한 읍락 국가로 볼 수 있다. 결국 감문국은 감천의 중하류에 위치하여 비옥한 충적 평야를 기반으로 기원전후 1세기경 성립되어 정치적 성장을 꾀했으나, 고대 국가로 성장하기 전 단계에서 여타 소국에 비해 일찍이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사로국, 즉 신라에 의해 정복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서에 등장하는 감문국]
삼한 시대 변한계 12국 가운데 하나로 분류된 감로국의 존재와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그 중 정약용(丁若鏞)과 이병도(李炳燾)은 감로국은 김천과 개령 지방 일대에 있던 소국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등장하는 감문국과 감로국이 동일하다고 보았다. 중국 사서에 기록된 감로국과 우리 사서인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하는 감문국의 동일성 여부에 대해서는 각종 사료와 정황을 통해 확인되었는데, 『삼국지위지동이전』 한조에 기록된 ‘감로’라는 표현은 당시 중국 상고음(上古音)에 따른 표기로, 감로(甘路)·감천(甘泉)·감내·감물(甘沕)·감문(甘文)은 결국 감천(甘川)이란 하천에서 파생된 동일한 음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서에 감문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로, 신라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2년 7월 조에 “이이찬석우로위대장토파감문국이기지위군(以伊湌昔于老爲大將討破甘文國伊其地爲郡)”, 즉 “신라가 이찬 석우로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멸하고 그곳을 감문군으로 삼았다.”고 기록된 이래 모든 사료에 감문으로 등장하고 있다. 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제3권 신해년(辛亥年) 신라 조분왕(助賁王) 조에도 위와 유사한 구절이 등장하는데 “가을 7월 신라에서 이찬(伊湌) 석우로(昔于老)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을 쳐서 깨뜨리고 그 땅은 군(郡)으로 삼았다. 우로(于老)는 내해왕(柰解王)의 아들이었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사절요』 이래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고지도와 지리지, 향지 등의 사료에는 감문국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1682년(숙종 21)에 간행된 『동여비고(東輿備攷)』 경상도좌우주군(慶尙道左右州郡) 총도(總圖)의 김산·지례·개령 부분도에는 감문산을 중심으로 “이십리 감문왕 김효왕릉(二十里 甘文王 金孝王陵)”, 또 왼쪽으로 “칠리 감문왕비장부인릉 장릉(七里 甘文王妃獐夫人陵 獐陵)”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1895년에 발간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와 1933년의 『교남지(嶠南誌)』, 1929년의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1934년의 『감문국개령지(甘文國開寧誌)』에도 예외 없이 김천의 연혁과 관련해 “감문소국신라취지(甘文小國新羅取之)”라 하여, 김천 지역이 원래 ‘감문’이란 작은 나라였는데 신라에 의해 폐합되었다는 기록이 공통으로 등장한다. 조선 후기 인문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관련 사료를 종합해 볼 때 감문국의 중심지는 지금의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일대로 추정된다. 또한 그 영역은 감문면과 아포읍, 어모면, 조마면까지 미쳤을 것으로 보는데, 일부 학자들은 선산군 무을면 일대까지를 감문국의 영역으로 보기도 한다.
감문국의 국가 규모에 대해서는 특별한 근거는 없으나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진한과 변한의 규모를 “대국사오천소국육칠백가총사오만호(大國四五千小國六七百家總四五萬戶)”라 한 것이나, 중국 사서로 추정되는 『동사(東史)』에 “아포반대발삼십야도감천수견창이퇴(牙浦叛大發三十夜渡甘川水見漲而退)”, 즉 “아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삼십 명의 대군으로 밤에 감천을 건너려 했으나 물이 불어나 되돌아왔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 감문국의 규모는 600~700가구에 달하고, 군사 30명을 대군(大軍)으로 표현할 정도의 국세를 보유한 정도의 소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왜 감문국을 정벌했을까?]
『삼국사기』와 『삼국사절요』에는 신라가 이찬 석우로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멸하고 그곳을 감문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진한 12국의 하나인 사로국이 주변 소국을 차례로 복속하여 일찍이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후 영역 확장을 꾀하는 과정에서 낙동강 서편의 변한 12국을 공략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감문국이 위치한 김천 지역이 영남 내륙의 교통 요지이자 한강 유역으로 연결되는 거점에 해당되어 일찍부터 신라의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감문국은 주조마국과 함께 고령·성주 등과 인접해 있어 일찍부터 가야 제국들과 친교하며 문물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친가야 정책을 견지했다. 신라의 감문국 복속은 1차적으로는 친가야·친백제로 기울던 상주의 사벌국(沙伐國)과 감천을 경계로 역시 가야와의 유대를 긴밀히 해 온 감문국·주조마국의 연결 고리를 끊어 변한계 소국들과 가야·백제의 결속을 약화시키려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신라는 고구려·백제에 대적하며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확보하기 위해 금강 유역과 소백산맥 서편으로의 진출을 통해 추풍령을 확보하고, 거창·성주·합천 등지의 가야 세력과 상주의 사벌국 공략을 위한 전초 기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신라는 감문국을 토벌한 지 10여 년 후인 첨해왕(沾解王)[247~267] 대에 마침내 사벌국을 복속시켰고, 470년(자비왕(慈悲王) 13년)에는 추풍령을 넘어 충청북도 보은까지 진출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축조하고 금강과 한강 유역으로의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가야에 대한 신라의 공략은 감천이라고 하는 자연적인 장애물과 백제의 견제, 가야 제국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300년 가까이 대치 상황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561년 대가야가 망하면서 변한계 12국 중 마지막으로 감천 서편의 주조마국이 함께 멸망하였다. 신라는 감문국을 복속한 이후부터 8세기 중엽까지 감문군(甘文郡)-감문주(甘文州)-개령군(開寧郡) 등으로 개편하면서 김천 지역을 정치, 군사적 거점으로 삼는다.
[감문국을 멸망시킨 신라 왕족 석우로]
친가야, 반신라 정책을 견지하며 독자적인 정치 세력화를 도모하던 감문국은 서기231년 신라의 왕족이며 대장군인 석우로(昔于老)에 의해 토멸되었다. 이후 1700여 년의 풍상 속에서 대부분의 유물이 멸실되어 온전한 형태의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감문국을 토벌하여 공신으로 높은 벼슬에 오른 석우로가 왜국(倭國)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장에서 술에 취해 사신에게 “머지않아 너희나라 임금을 잡아다가 소금 만드는 노예로 삼고 왕비는 밥 짓는 노비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야사(野史)에 전한다. 당시 감문국 토벌의 중심인물인 석우로의 흉폭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감문국이 석우로의 군사들에 의해 얼마나 철저히 파괴되었을지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산성 유적을 통해 본 감문국]
감문국과 관련된 대부분의 유적은 파괴되고 멸실되었으나 산성 등 일부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해 감문국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그 중 감문산성(甘文山城)은 높이 239m의 감문산 정상부에 축조된 산성으로, 유사시 피난처 및 지휘소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감문산 정상부에는 능선을 따라 인위적으로 축조된 흔적이 뚜렷한 토성(土城)이 길이 200m, 높이 2.5m, 폭 10m 남짓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중앙부의 흙을 파내 정상으로부터 바깥쪽으로 급경사가 되도록 쌓고 중심부를 평평하게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감문산은 성황산(城隍山)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이는 감문산이 감문국의 내성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堡壘)라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또 취적봉(吹笛峰) 또는 봉수산(烽燧山)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 산의 정상에서 피리를 불거나 봉홧불을 피웠다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지금도 봉수대의 흔적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또 다른 감문국 시대의 산성 유적인 속문산성(俗門山城)은 감문면 문무리와 송북리 사이 속문산 600m 지점에 축조된 산성이다. 능선을 따라 동북으로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이 혼용되어 축조되었고, 성북마을이 있는 동북쪽으로는 자연 절벽을 그대로 활용했다. 확인된 성곽은 먼저 석축을 70㎝ 정도 하단에 쌓고 그 위에 토성을 쌓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높이는 2.5m이고 길이는 800m에 달하는데, 석성은 대부분 무너지고 현재 일부만이 남아 있다. 성내 북서쪽 끝부분에는 둘레 30m, 지름 10m, 높이 5m의 봉수대 터가 남아 있고, 정상부에는 무연고 묘지가 들어서 있다.
군창(軍倉) 터로 추정되는 정상부 하단 평탄지에서는 지금도 기와편이 산재해 있고 건물 기둥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있는 대형 주춧돌도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속문산성에 대해 “석축주위이천사백오십오척 고칠척 내유이천이지 유군창(石築周圍二千四百五十五尺 高七尺 內有二泉二池 有軍倉)”, 즉 “석축의 둘레는 2455척이고 높이는 7척인데, 성내에 우물 두 개와 못 두 개, 군창이 있다.”라고 적고 있다. 『조선환여승람』에도 속문산성과 관련된 구절이 등장하는데, “재군북사십리석축주이천사백오십척내유이천이지(在郡北四十里石築周二千四百五十尺內有二千二池)”, 즉 “군의 북쪽 40리에 있는데 석축의 둘레가 2540자이고 안에는 두 개의 샘과 두 개의 못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우물과 저수지에 대해서 인근 주민들에게 확인해 본 결과, 30여 년 전까지 우물과 물이 고인 큰 규모의 웅덩이를 목격했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으나 현재는 위치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속문산은 백운산(白雲山)이라고도 하는데, 전설에 따르면 감문국이 신라에 망하자 백성들이 속문산으로 들어가 끝까지 항전하다가 급기야 몰살을 당했고, 그 원혼이 구름으로 변해 산을 덮으므로 백운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고소산성(姑蘇山城)은 감문면 문무리와 어모면 구례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높이 365m의 고소산(姑蘇山), 일명 성산(城山) 정상부로부터 50여m 아래에 남북으로 길이 700m에 달하는 허물어진 석성으로 남아 있는데, 멀리 속문산성과 마주보는 형국을 하고 있다. 석성의 대부분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나 일부는 높이 5m에 달하는 거의 완벽한 형태의 성벽이 곳곳에 남아 있다. 고소산성은 토성인 감문산성, 토성과 석성이 혼재된 속문산성과 달리 거의 대부분을 석재로 축성한 것으로, 골짜기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정밀하게 축조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근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옹성(甕城)이 있었을 가능성 등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이전의 축조 방식과 달리 가공한 석재를 이용해 한층 견고하면서도 세련된 축성술을 보여 주고 있다.
감문국의 주 무대였던 개령면과 감문면 일대 높이 300m 내외의 산정에는 크고 작은 산성들이 축조되어 있다. 이것은 신라가 감문국이 입지한 김천 지역을 가야 공략의 전진 기지로 삼는 동시에 추풍령 확보를 통한 금강 유역 진출에 사활을 걸고 감문국을 집중 공략하자 감문국이 자구책의 일환으로 많은 산성을 축조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감문국을 복속한 신라가 이 지역에 감문군[231년], 감문주[557년]를 설치하는 등 지방 행정과 군사 거점으로 활용하면서 감문국 시대에 축조된 산성의 개보수를 통해 가야와 백제의 공략에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감문국 시대의 산성으로 추정되는 이들 세 성의 축조 시기는 순수 토성인 감문산성이 시기적으로 가장 빠르고, 그 뒤로 토성과 석성이 혼재된 속문산성, 규모와 그 정교함에서 돋보이는 고소산성이 가장 후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감문국의 흔적들]
개령면 동부리·양천리·서부리와 감문면 삼성리·문무리 일대에는 감문국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감문산이 감문국의 내성(內城)이었다면 경제적 기반인 감천 일대의 농경지와의 중간 지점인 동부리와 양천리 일대는 감문국의 중심에 해당하는 궁궐 터였다. 궁궐의 위치에 관해 『동국여지승람』과 『교남지』에는 “유산북동원방감문국시궁궐유기유존(柳山北東院傍甘文國時宮闕遺基猶存)”, 즉 “유산의 북쪽 동원 옆에 감문국 시대의 궁궐 터가 남아 있다.”고 적고 있다. 또 『조선환여승람』에도 “재개령면동부동감문국시대궁궐기지초석상존(在開寧面東部洞甘文國時代宮闕基址礎石常存)”, 즉 “궁궐 터는 개령면 동부동에 있는데 감문국 시대의 궁궐 터와 초석이 남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준식(愚儁植)은 1934년에 간행한 『감문국개령지(甘文國開寧誌)』 고적 궁궐 유지(宮闕 遺址) 편에서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에 감문국 시절의 궁궐(宮闕)은 거금(距今) 1703년 전에 신라국(新羅國)에 망하였으나 오늘날까지 그 궁궐의 자최는 금일까지에 긍(亘)하여 초석(礎石)이 상존(尙存)하고 금인(今人)으로 하여곰 감고지회(感古之懷)를 자아내게 하는구나 즉(卽) 그 유지(遺址)는 지금 유동산북동원방(柳東山北東院傍)이였고 연당(蓮塘)의 부근 일대이였으니 수구(愁久)한 세월에 눈물의 자최가 역력(癧癧)하고나.”라고 적었다.
그런데 각 문헌마다 공통적으로 유산 북쪽과 동원(東院) 옆이 궁궐 터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유산은 현재의 유동산(柳東山)을 가리킨다. 관용 숙소였던 동원은 동부리에서 양천리로 넘어가는 역마고개 인근에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역마고개 일대가 궁궐의 중심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1960년대 말까지 양천리 487번지 육종철 집 마당에 감문국 시대의 궁궐 초석이라고 전해지는 가공한 석재들이 몇 기 남아 있었던 것으로 전하며, 현재도 대문 앞에 일부가 돌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감문국개령지』에서 궁궐의 연못으로 지목한 동부연당(東部蓮塘)은 현재도 유동산 아래 선산 방면 지방도 옆에 일부가 남아 있다. 김효왕릉(金孝王陵)은 감문국 시대 왕릉으로 전해지는 고분으로, 궁궐 터에서 감문산을 넘어 북쪽으로 8㎞ 떨어진 현 감문면 삼성리 오성마을 930번지 밭 가운데 봉분 높이 6m, 지름 15m 크기로 남아 있는데, 김천 지역에서는 가장 큰 고분이다. 이 능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감문국 시조왕의 무덤이라는 설과 김천의 별호인 금릉(金陵)이 이 무덤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일부에서 제기된 군왕의 무덤치고는 규모가 작다는 지적과 관련해서는, 감문국과 비슷한 시기의 중국 묘제인 움무덤 양식을 한반도에도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당시 군왕의 권력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과 달리 봉분을 크게 높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다른 견해로는, 우리나라 무덤 양식의 변천사를 볼 때 봉분을 높게 조성하는 방식은 기원후 5세기 이후에나 등장했기 때문에 김효왕릉의 조성 시기는 감문국의 멸망 후로 보기도 한다. 이것은 감문국이 신라에 의해 복속된 후 지역민 회유 차원에서 상당 기간 감문국의 토착 세력에 의한 지배를 신라가 용인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효왕릉의 규모는 현재보다 큰 규모였다고 하나 오랜 세월 경작지로 잠식되어 전체적인 규모가 축소되었고, 일제 강점기 수차례 도굴되어 부장품의 존재 여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특별한 의미 없이 말무덤으로 불려 왔는데, 여기서 ‘말’은 ‘크다’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로 봐야 하므로 말무덤은 큰무덤, 곧 수장(首將)의 무덤으로 봐야 할 것이다.
김효왕릉에 관해 『동국여지승람』과 『교남지』에는 “재현북이십리유대총속전감문김효왕릉(在縣北二十里有大塚俗傳甘文金孝王陵),” 즉 “현의 북쪽 20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전하기를 감문국 김효왕릉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조선환여승람』에는 “재곡송면삼성동유대총속전감문국김효왕릉(在谷松面三盛洞有大塚俗傳甘文國金孝王陵)”, 즉 “곡송면 삼성동에 큰 무덤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감문국 김효왕릉이라 한다.”고 적혀 있다. 『감문국개령지』에도 “이 능은 감문국 김효왕릉이니 현 감문면 삼성동[구 오성동] 아래에 있으나 지금은 잡초송목(雜草松木)이 분생(奔生)하야 보는 사람의 안타가운 가삼을 진정(鎭定)할 수 없을 만치 거치러웠도다.”라고 적고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다.
옛 무덤 거치러지고/ 거치러진 풀이 요란하니/ 아마도 금효왕 넋이/ 편치 않은가 하노라
장릉(獐陵) 또는 장부인릉으로 불리는 또 다른 고분은 개령면 서부리 웅현(熊峴) 도로 변의 옛 사자사(獅子寺) 터 옆에 있으나, 지금은 경작지로 개간되어 정확한 봉분의 형체를 분별할 수 없다. 향지 곳곳에 기록이 등장하는 장릉은, 구전으로 감문국 시대의 어느 왕비 무덤으로 알려져 왔으나, 금효왕 어머니의 능(陵)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장릉재현서웅현리속칭감문국시장부인릉(獐陵在縣西熊峴里俗稱甘文國時獐婦人陵)”, 즉 장릉은 현의 서쪽 웅현리에 있는데 세상에서 말하길 감문국 시대 장부인의 능이라고 한다.”고 적었고, 『조선환여승람』 역시 “장릉재개령면서부동속전감문국시장부인릉(獐陵在開寧面西部洞俗傳甘文國時獐婦人陵)”라고 적었다. 『교남지』 역시 “장릉재군서웅현리속전감문국시장부인릉(獐陵在郡西熊縣里俗傳甘文國時獐婦人陵)”이라 하여 유사하게 적고 있다. 『감문국개령지』에는 “일명 장부인릉이라고 하고 일명은 장희릉(獐姬陵)이라고 하나니 현재 서부동 서편 웅현에 있으니 감문국 때의 어너 임금님의 총희(寵姬)였든 것이다.”라고 적고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다.
사랑하는 장희(獐姬)가 어이가단 말가/ 한번 가면 몯올 길을 어이 가단 말가/ 궁궐(宮闕)에 계옵신 임금님의 옷깃에/ 구슬같은 눈물 떠러트리고/ 천백년千百年) 잘 있으라 축원(祝願) 드리였거든/ 어인일가 오날의 메여진 무덤 우에/ 무심(無心)한 까마귀 앉었다 날너더라
이외에도 개령면과 감문면 일대에는 무수한 고분들이 청동기와 철기 시대 묘제인 고인돌들과 혼재해 있다. 특히 감문면 문무리 마을 주변과 야산에는 수십 기에 달하는 고인돌과 훼손된 석실분이 집단으로 분포되어 있어 감문국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개령·감문 지역이 이 지방의 중심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지명과 전설에 나타난 감문국]
감문·개령 일대의 지명과 전설에서도 감문국과 관련된 또는 신라와의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들이 속속 등장한다. 감문국의 진산인 감문산은 달리 취적봉(吹笛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감문국 시대에 나라에 변고가 있거나 군사를 동원할 때 산에서 피리나 소라를 불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내황골[內皇谷]은 개령면 양천리 당고산 뒤쪽 골짜기로 감문국의 왕비가 거처하는 내황실(內皇室)이 있었다고 한다. 동고산(㨂鼓山)은 개령면 양천리 마을 뒤 높이 140m 야산으로 감문국 시대에 나라에 변란이 생길 때 이 산에 걸어 놓은 북을 쳐서 알렸다고 전한다. 성안골[城內谷]은 양천마을 뒤 감문산 골짜기로 감문국 시대에 성을 쌓고 일반 백성들이 살았다고 전한다. 진대골[陣大谷]은 양천마을 앞 감천 변의 유동산 아래를 일컫는 지명으로, 감문국 시대 군사들이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했다고 전한다.
세자궁터는 개령면 동부리 호두산 오른쪽 일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옛 감문국 시대 세자의 별궁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감문국개령지』에는 세자궁터와 관련해 “이 세자궁도 감문국 시절의 이야기니 사록(史錄)이 없음으로 미상(未詳)하나 오늘날 동부동[구 교동] 호두산 좌측 하이니 그 터에 지금 패구나무 오파(五把)나 되는 것이 옛말을 일러 주는 듯하며 세칭(世稱)이 터를 세자궁터라 하나니라.”라고 적었다.
애인고개(愛人고개)는 개령면 신룡리와 대광동 묘광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 감문국과 신라가 대치할 당시 신라 총각과 감문국 공주가 사랑에 빠져 이루지 못할 사랑을 하다 공주가 상사병에 걸려 고갯마루에서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또 나벌들은 개령면 신룡리 앞 평야를 일컫는 지명으로, 감문국 시대 나씨(羅氏) 성을 가진 장군이 이곳에서 태어나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그런데 뒷날 감문국을 정벌한 신라 석우로 장군이, 신룡리 하신마을 장수천(將帥泉)의 물을 마시고 감문국에 유명한 장군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장수천이 있던 하신마을을 없애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원룡장군샘(元龍將軍샘)은 개령면 광천리 빗내마을의 사달산(四達山) 너른골 기슭에 있는 샘으로, 원룡장군수(元龍將軍水)로도 불리는 우물이다. 전설에 진동(陳童)이란 아이가 이 물을 먹고 힘이 세어져 감문국에 큰 공을 세우고 원룡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힘이 세어진 진동은 사달산 용천바위를 깨어 마을 앞 개울에 다리를 놓았다고 하는데, 어느 날 지고 내려오던 바위가 굴러 떨어져 땅에 박혀서 지금도 일대 지명이 바위백이로 불리며, 그 바위가 수년 전까지 남아 있었으나 경지 정리 과정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감문국 군사들의 몸짓이 남아 있는 빗내농악]
빗내농악은 김천 지역을 대표하는 풍물로서 감문국 시대 군사들이 진영(陣營)을 펼치고 조련하는 과정과 전쟁에 출전하거나 개선할 때 군사들을 위로하는 연희의 성격이 담긴 군사굿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아울러 김천 지역 소국의 맹주였던 감문국이 아포국, 주조마국, 어모국, 배산국, 문무국 등 주변 읍락을 다스리고 단합을 과시하기 위해 나라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나라 제사가 동제사의 형태로 면면히 계승되어 왔다고도 한다. 빗내농악의 발상지로 일컬어지는 빗내마을은 감문국의 읍치인 개령군 동부리와 양천리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감문국이 여타 소읍락을 거느리는 국읍으로서 제천 행사를 주관하던 제례 의식이 군사 조련과 결합되어 전국 유일의 군사 농악, 즉 진굿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문학 작품에 나타난 감문국]
감문국은 많은 문학 작품을 통해서 부활하고 면면히 이어져 왔다. 시인 묵객들은 개령 땅을 찾아 감문국의 옛 영화를 회고하고 신라에 의해 짓밟힌 비운의 감문왕조를 한탄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주세붕(周世鵬)[1495~1554]은 『무릉잡고(武陵雜稿)』에 개령 땅을 지나며 지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감문고국신추우(甘文故國新秋雨)[감문국 옛 터에 초가을 비 내리는데]
백발풍기태수행(白髮豊基太守行)[백발의 풍기군수 이곳을 지나네]
진중동루쌍합주(珍重東樓雙榼酒)[동루에서 진중히 술잔 나누니]
백년청안사군정(百年靑眼使君情)[한 생애 친한 벗 사군의 정일세]
조선 전기의 명문장가로 매계 조위(曺偉)의 서제(庶弟)인 김천 출신 적암(適庵) 조신(曺伸)[1454~1528]도 『군지제영(䐃誌題詠)』에서 감문국을 언급하고 있다.
증속감문일부용(曾屬疳文一附庸)[일찍이 감문국의 한 고을이더니]
시분도첩작뢰봉(始分圖牒作雷封)[비로소 도첩을 나누어 현이 되었네]
우금극군민번서(于今劇郡民繁庶)[오늘날 군민이 극히 번성함은]
위유선왕태실봉(爲有先王胎室峰)[선왕의 태실봉을 두어서였네]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진사 박영무(朴永武)는 「무민루서(撫民樓序)」에서 다음과 같이 옛 감문국의 정취를 노래하고 있다.
김효왕릉춘초생(金孝王陵春草生)[김효왕릉에 봄풀이 돋고]
홍평장리모연횡(洪平章里暮煙橫)[홍평장리엔 저녁연기 걸리네]
관인관창산화곡(官人慣唱山花曲)[관인은 익숙하게 산화곡을 부르는데]
적월루두이절명(笛月樓頭耳晢明)[적월루에 오르니 더욱 또렷이 들리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1749~?]은 우리 민족이 세운 전국의 21개 도읍지를 답사하면서 노래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에서 사라져 간 감문국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장비일거야화향(獐妃一去野花香)[장부인은 간 지 오래인데 들꽃은 향기롭다]
매몰잔비거효왕(埋沒殘碑去孝王)[땅에 묻힌 낡은 비는 금효왕의 흔적]
삼십웅병추대발(三十雄兵酋對發)[크게 일으킨 군사 삼십 명]
와우각상투천장(蝸牛角上鬪千場)[달팽이 뿔 위에서 천 번은 싸웠으리]
1708년(숙종 34)부터 1712년(숙종 38)까지 개령현감을 역임한 장진환(張震渙)도 김효왕릉에 들렀다가 시를 남겼다.
고백창송금독유(古栢蒼松今獨留)[옛 잣나무 푸른 솔은 아직도 홀로 남았는데]
번화유촉부사구(繁華遺躅付沙鷗)[번성했던 자취는 모래벌 갈매기에게 부쳤네]
이리초수공산리(離離草樹空山裡)[무성한 초목은 빈 산을 지키는데]
초목반등동야구(樵牧攀登動野謳)[초목동이 올라앉아 노래나 부르네]
1755년부터 1757년까지 계령현감을 역임한 이민보(李敏輔) 역시 감문국에 대한 회고의 정을 실감나게 노래했다.
일편황산패업유(一片荒山覇業留)[한 조각 거친 산에 패업의 흔적이 남아]
두견제파조사구(杜鵑啼罷弔沙鷗)[두견새 흐느끼며 갈매기를 조상하네]
수주숙슬릉허식(數株肅瑟陵墟植)[몇 그루 나무가 쓸쓸한 왕릉 지키고]
송백임유공단구(松柏臨溜共短謳)[물가의 송백 숲에서 나 또한 노래하네]
1862년부터 2년간 개령현감을 역임한 이종상(李鍾祥)의 시는 다음과 같다.
고백황량선침유(古栢荒凉仙寢留)[오래 묵은 잣나무 황량한 곳에 능묘만 남았고]
동풍견곡조사구(東風鵑哭弔沙鷗)[동풍에 두견새 울어 백구를 조상하네]
여산만세영황총(驪山萬世瀛皇塚)[여산 만세에 영황의 무덤이요]
총상여금단목구(塚上如今但牧謳)[무덤 위엔 오늘 목동의 노래만 남았네]
[감문국 주변의 또 다른 소국]
감문국과 동시대에 김천 지역에 존재했던 여타 소국으로는 주조마국과 문무국(文武國), 어모국(禦侮國), 배산국(盃山國), 아포국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병도(李丙燾)은 주조마국의 존재와 관련해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기이년조(欽明紀二年條)에 등장하는 졸마(卒痲)와 『삼국지위지동이전』의 주조마국을 동일한 소국으로 비정하고 그 위치를 김천시 조마면 일대라고 주장했다. 주조마국이 위치한 조마면은 감천의 서쪽에 해당하여 증산면, 지례면, 남면, 농소면과 함께 일찍이 성주의 성산가야와 밀접한 교류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기록이 보이는데, 신라가 감문국과 사벌국을 복속하고 가야 제국을 위협하자 서기 541년과 544년에 대가야·아라가야(阿羅伽倻)·다라국(多羅國)·졸마국(卒馬國)·사이기국·고차국·자다국(子多國)·산반하국·걸찬국(乞餐國)·염례국 등이 함께 백제의 힘을 빌리고자 두 차례에 걸쳐 백제 왕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했다고 적고 있다. 결국 562년 이사부(異斯夫)가 대가야를 토벌할 때 주조마국이 함께 토벌된 점도 가야 제국과의 관계를 반증해 주는 대목이다.
그 외 문무국·어모국·배산국·아포국의 존재에 대해서는 구전으로만 전한다. 지금도 지역의 촌로들 사이에서는 “여산(余山)이 망해서 아산(牙山)이 되고 아산이 망해서 김산(金山)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여산은 지금의 감문면 문무리로 윗마을을 상여(上余), 아랫마을을 하여(下余)라 한다. 문무리 일대에는 청동기 시대로부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고인돌과 돌방무덤이 집중적으로 산재되어 있어 문무국의 존재가 새삼 주목되고 있다.
또 아산은 지금의 어모면 중왕리 아천(牙川)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이 일대에 어모국이라는 소국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라 시대에 현을 설치하면서 어모국의 이름을 따서 어모현이라 했다는 지명 유래가 전해진다. 배산국은 조마면 장암리 일대에 있었다는 소국으로, 실제 마을에 배산(盃山)이라는 산이 있으나 이 역시 구전으로만 전하는 관계로 증명된 바는 없다. 김천시 아포읍 제석봉 아래 제석리 일대에는 아포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주변에 수기의 고분과 성곽의 흔적이 발견되고, 왕비봉(王妃峰)·관리봉(官吏峰)·삼태봉(三胎峰) 등과 같은 지명이 예사롭지 않다. 아포국과 관련해서는 『동사』에 “아포가 배반을 해서 대군 30인을 일으켜 밤에 감천을 건너다가 물이 불어나 되돌아왔다[牙浦叛大發三十夜渡甘川水見漲而退].”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감문국은 감천을 유역으로 하는 여타 소국의 맹주로 군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특히 문장 중에 ‘배반할 반(叛)’ 자를 사용한 것으로 볼 때 주종 관계를 유지하던 아포국이 감문국에 반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정벌을 시도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가야와 김천 지역 간의 문화 교류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김천시 남면 부상리의 누에고치실이다. 1970년 고령에서 발견된 『산천유집(山泉遺集)』이란 자료에는 가야금을 창제한 우륵(于勒)이 작곡했다는 12곡의 ‘가야금부(伽倻琴賦)’, 즉 가야금 노래가 실려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 넷째 곡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달기(達己)의 넷째 곡조여/ 새로 만든 거문고를 보아 하니/ 조양(朝陽)의 오동나무로 조각하고/ 부상(扶桑)의 고치실로 줄을 메었으니/ 용과 봉황이 춤을 추어/ 비취 같은 푸른 무늬를 펼쳤네/ 진쟁(秦箏)을 본 따 만들고/ 상금(湘琴)을 본 따 줄을 메었네
여기서 등장하는 부상은 김천시 남면 부상리로 일제 강점기까지 잠업(蠶業)이 번성한 곳이고, 조양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정대리의 옛 지명으로 지금은 없어졌으나 과거 오동나무의 집단 자생지로 유명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1965년 김천시 조마면 장암리에서 출토된 토기가 1968년 경상남도 창녕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와 동일한 양식의 가야토기로 밝혀짐으로써 김천과 가야의 문화 교류가 활발했음이 입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