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4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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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知禮縣 |
영어의미역 | Jirye-hyeon |
이칭/별칭 | 구성(龜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삼조 |
제정 | 75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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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 1018년 |
개정 | 1390년 |
개정 | 1895년 |
관할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구성면|부항면|대덕면|증산면 |
[정의]
757년부터 1895년까지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제도.
[제정 경위 및 목적]
신라 시대에는 지품천현(知品川縣)이라 불렸으며, 757년(경덕왕 16)에 지례현(知禮縣)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어모현, 무풍현, 김산현과 함께 개령군(開寧郡)의 영현이 되었다.
[관련 기록]
1.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사기』 권 제34 잡지 제3 지리 1 신라 상주 개령군에 “개령군(開寧郡)의 ···(중략)··· 영현이 넷이었다. ···(중략)··· 지례현(知禮縣)은 본래 지품천현(知品川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 도 그대로 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2. 『고려사(高麗史)』
『고려사』 제57권 지 제11 지리 2 상주목 경산부에 “지례현(知禮縣)은 원래 신라의 지품천현(知品川縣)인데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개령군(開寧郡)의 관할 하에 현으로 만들었다. 현종 9년에 본 부에 소속시켰으며 공양왕 2년에 감무를 두었는 바 구성(龜城)이라고도 부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 제82권 지 제36 병 2 참역조에는 “경산부도(京山府道)는 25개 소를 관할한다. 안언(安堰), 답계(踏溪) 경산(京山), 안림(安林) 고령(高令), 수향(水鄕), 연정(緣情) 팔거(八莒), 설화(舌火) 화원(花園), 무기(茂淇) 가리(加利), 김천(金泉) 김산(金山), 속계(屬溪) 황간(黃間), 장곡(長谷) 지례(知禮), 순양(順陽) 양산(陽山), 토현(土峴), 이산(利山), 이인(利仁) 안읍(安邑), 증약(增若) 관성(管城), 작내(作乃) 지례(知禮), 낙양(洛陽), 낙산(洛山) 상주(尙州), 회동(會同) 영동(永同), 원암(猿岩), 사림(舍林) 보령(報令), 추풍(秋風), 어모(御侮), 상평(常平) 중모(中牟), 안곡(安谷) 선주(善州), 장녕(長寧) 화령(化令), 부상(扶桑), 개령(開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실록』 세종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지례현조에 “지품천현(知品川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개령군(開寧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현종 9년 무오에 경산부(京山府) 임내(任內)에 붙였으며, 공양왕 2년 경오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구성(龜城)이다. 부곡(部曲)이 2이니 월이곡(月伊谷)·두의곡(頭衣谷)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성주(星州)에 이르기 9리, 서쪽으로 전라도 무주(茂朱)에 이르기 26리, 남쪽으로 거창(居昌)에 이르기 33리, 북쪽으로 김산(金山)에 이르기 11리이다. 2백 30호, 인구가 1천 2백 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30명, 진군(鎭軍)이 20명, 선군(船軍)이 80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 경상도 지례현에는 “동쪽으로 성주(星州)의 경계까지 13리, 서쪽은 전라도 무주현의 경계까지 38리, 남쪽은 거창군(居昌郡)의 경계까지 46리, 북쪽은 김산군(金山郡)의 경계까지 15리고, 서울과의 거리는 624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건치 연혁조에는 “본래 신라의 지품천현(知品川縣)이었는데, 경덕왕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개령군에 소속되었다. 고려 현종 때에 경산부(京山府)에 소속되고, 공양왕 때에 감무를 두었으며, 본조 태종 때에 현감으로 고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5.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증보문헌비고』 연혁조에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가 편찬될 당시 지례현의 위치는 동쪽으로는 성주(星州), 서쪽으로는 전라도 무주(茂朱), 남쪽으로는 거창(居昌), 북쪽으로는 김산(金山)을 경계로 자리 잡았다. 호수는 230호, 인구는 1,200명이었다. 대표적 성씨를 살펴보면, 지례현을 본관으로 하는 토성(土姓)에는 박(朴)·전(錢)·장(張)·강(康)씨가 있었고, 속성(續姓)에는 약목(若木)의 이(李)·문(文)씨가 있었으며 모두 향리 집안이었다. 월이곡(月伊谷)의 속성(續姓)에는 박(朴)씨, 두의곡(頭衣谷)의 속성은 주(朱)씨로 모두 향리 집안이었다. 벼·조·기장·배[梨]가 잘 자랐고, 공물에는 꿀·밀[黃蠟]·호도·칠·종이·삵 가죽·노루 가죽이며, 토산품에는 신감초(辛甘草)·송이버섯·은구어가 있었다. 그 밖에 구산석성(龜山石城), 작내역(作乃驛)·장곡역(長谷驛), 봉화 한 곳이 있었다.
[변천]
지례현은 1018년(현종 9)에 경산부(京山府)[성주]의 속현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 감무(監務)가 파견되면서 독립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현감(縣監)을 파견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 제도 개편[칙령 제98호 지방제도개정건]에 따라 지례군으로 승격되면서 대구부의 관할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