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4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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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寧縣-開令縣 |
영어의미역 | Gaeryeong-hyeon |
이칭/별칭 | 청주(靑州),감문(甘文),감주(甘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
시대 | 조선/조선,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삼조 |
제정 | 14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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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 1601년 |
개정 | 1606년 |
개정 | 1609년 |
개정 | 1985년 |
관할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개령면|감문면|남면|농소면 |
[정의]
1413년부터 1601년까지, 1609년부터 1895년까지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제도.
[제정 경위 및 목적]
삼한 시대에 감문소국(甘文小國)이 있었던 곳으로, 231년 신라가 감문국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감문군(甘文郡)을 설치하였다. 557년(진흥왕 18)에는 감문주(甘文州)를 두었다가 진평왕(眞平王) 대에 폐지했으나, 661년 다시 감문군을 두었다. 757년(경덕왕 16)에 개령군으로 고쳐 상주에 속하게 하였다. 1018년에는 상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하였다. 1413년에 지방 제도 개혁에 따라 개령현이 되었다.
[관련 기록]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개령현조에 “개령현은 본디 감문소국인데, 신라에서 취(取)하여 진흥왕이 청주(靑州)를 설치하였고,[바로 진 무제(陳武帝) 영정(永定) 원년 정축이다.] 진평왕이 주(州)를 폐하고, 문무왕(文武王)이 감문군(甘文郡)을 설치하였다가,[바로 당고종(唐高宗) 용삭(龍朔) 원년 신유이다.] 경덕왕이 개령군(開寧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현종 9년 무오에 상주(尙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명종 임진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 계사년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2.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 경상도 개령현에 “동쪽은 선산부의 경계까지 19리, 인동현의 경계까지 42리, 남쪽은 성주의 경계까지 38리, 서쪽은 김산군의 경계까지 14리, 북쪽은 선산부의 경계까지 31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8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건치 연혁조에는 “본래 감문소국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아 진흥왕 때에 청주(靑州)로 고쳐 군주(軍主)를 두었으며, 진평왕 때에 주를 폐지하고, 문무왕 때에 감문군으로 하였다가 경덕왕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다. 고려 현종 때에는 상주에 소속하였고, 명종 때에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 태종 때에 규례에 따라 현감으로 고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 기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는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선조(宣祖) 34년에 김산군(金山郡)에 합쳤다. 역적 길운절(吉云節)의 복주(伏誅)로서 39년 선산부(善山府)에 소속되었다가 광해주 원년에 다시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보면, 당시 개령현은 동쪽으로 선산(善山)에서 14리, 서쪽으로 김산(金山)에서 9리, 남쪽으로 성주(星州)에서 31리, 북쪽으로 김산(金山)에서 19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역(驛)은 양천(楊川)과 부상(扶桑)이 있었으며 봉화는 한 곳이 있었다. 당시 호수는 530단(單) 1호, 인구가 2,359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65명, 영군(營軍)이 5명, 진군(鎭軍)이 9명, 선군(船軍)이 146명이었다.
대표적 토성(土姓)에는 홍(洪)·임(林)·문(文)·전(田)·심(尋)씨, 내성(來姓)에는 옹(翁)·정(鄭)·박·김·백(白)씨, 촌성(村姓)에는 구(仇)씨, 속성(續姓)에는 정(鄭)·김(金)·백(白)·윤(尹)씨가 있었다. 땅이 기름졌으나 간전(墾田)[개간하여 만든 밭]이 4,190결로 전체 논의 5분의 2가 넘었다. 주로 벼·기장·뽕나무·목면(木綿)이 잘 재배되었다. 공물(貢物)은 주로 호도·칠·여우 가죽·노루 가죽·삵 가죽이었다. 대표적 약재는 맥문동(麥門冬)이었다.
[변천]
개령현은 1601년(선조 34) 길운절(吉雲節)의 반란으로 인해 김산군(金山郡)에 합병되었다가 1606년(선조 39)에 다시 선산도호부(善山都護府)로 이속되었다. 그러나 1609년(광해군 1) 다시 개령현으로 복구되었다. 별호는 감주(甘州)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개령군으로 승격되어 대구부 관할 아래 있다가 1896년 13도제 실시로 경상북도에 소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