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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665
한자 松竹里遺蹟
영어음역 Songjuk-ri Yujeok
영어의미역 Relics in Songjuk-ri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시대 선사/석기
집필자 이주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1992년연표보기
발굴 조사 1993년연표보기
현 소재지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지도보기
성격 집터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고목마을에 있는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의 대규모 마을 유적.

[개설]

송죽리 유적은 구성지방공단 조성 계획으로 1992~1993년에 계명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다.

[위치]

송죽리 유적은 행정 구역상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고목마을에 해당한다. 낙동강(洛東江) 중류의 한 지류인 감천(甘川)이 남북으로 돌출된 산지로 인해 ‘U’자형으로 크게 구비 돌며 하천 안쪽에 형성시킨 충적 지대에 입지하고 있다. 더욱이 유수량이 풍부한 감천이 흐르고 배후에는 높은 산이 입지하고 있어 선사인들의 생업에 유리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선사 시대 송죽리 마을 사람들은 감천에 서식하는 다양한 어종을 포획하고 주변의 산에서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취하면서 생업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형태]

충적 지대에 여러 차례의 범람과 퇴적이 반복되면서 문화층의 일부가 유실되었다. 지형은 동쪽의 하천 범람에 의한 퇴적 외에 서쪽 산지에서 흘러내린 마사토에 의해 서쪽에서 동쪽으로 완만한 경사 지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에는 하천의 자연 제방이 산지 쪽보다 상대적으로 높아 유구들이 집중되어 있고, 청동기 시대에는 전체적으로 수평화되어 전 지역에 걸쳐 유구들이 분포한다.

조사 결과 신석기 시대의 경우, 집자리[住居址] 10기, 야외 노지(爐址) 15기, 석기 제작장 1개소 등의 유적과 즐문 토기, 석기류, 토제품이 출토되었다. 집터는 1동을 제외한 나머지 9동은 장방형이다. 집터 내부에서는 불 땐 자리 또는 둥근 모양의 화덕 시설과 저장 구덩이 등의 시설이 확인되었다. 주거지 바깥에서는 화덕 시설, 토기를 구운 장소로 추정되는 시설, 석기 제작장 등의 시설이 확인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구에서 출토된 유물은 바리 모양과 단지 모양을 기본형으로 하는 빗살무늬 토기류, 갈판과 갈봉, 돌도끼, 어망추 등의 생활 용구가 중심인 석기류 등이다.

청동기 시대의 경우, 집자리 61기[혹은 62기], 고인돌[支石墓] 19기, 쓰레기장[廢棄場]과 야외 조리 시설로 추정되는 적석 유구(積石遺構) 17기, 토기 가마[土器窯址]로 추정되는 구덩 유구[竪穴遺構] 2기가 조사되었다. 그 외 통일 신라 및 고려 시대 유구도 일부 조사되었다.

집자리는 평면 원형 19기, 평면 방형이 3기이고 세장방형 대형 집자리 3기를 포함한 장방형 계통이 39기이다. 크기는 평면 원형과 방형의 경우 크기가 300~400㎝로서 소형이며 세장방형은 장벽 590~960㎝, 단벽 300㎝ 내외로 중형 및 장방형은 280×320㎝~820×2,400㎝로 다양하다. 장방형의 경우 주축 방향이 대개 남북이며 출입구가 확인된 집자리는 7기이다.

화덕 자리[爐址]는 장방형 26기와 원형 3기에서 확인되는데 전자는 대개 돌두름식[圍石式]이고, 후자는 구덩식[竪穴式]인데 세장방형에는 2기를 가진 예가 많다. 기둥 구멍[柱穴]의 파진 방향은 집자리 가운데를 향해 경사져 있으며 주춧돌[礎盤]이 있는 경우도 있다. 화재는 모두 43기에서 확인되며 5호와 6호 대형 집자리는 화재 후 다시 사용한 흔적이 확인된다.

고인돌은 집자리군의 북쪽에 집중되어 있어 주거 지역과 무덤 지역을 의도적으로 분리하여 마을을 관리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19기 중 덮개돌[上石]은 5기만 확인된다. 무덤방[墓室]의 위치는 반지하식(半地下式) 2기 외에는 모두 지상식(地上式)으로, 바닥에는 대부분 강돌[川石]을 깔았다. 상태가 양호한 고인돌의 경우 일정한 묘역(墓域)이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원래 모두 묘역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묘역은 크기가 큰 방형의 경우 반타원형으로 작은 고인돌이 덧붙여진 경우도 있어 외관상 하나의 고인돌로 인식될 수 있다.

묘역 외곽에는 지름 30㎝, 깊이 30㎝의 원형 구덩을 파고 그 내부에 돌도끼[石斧]를 세워두거나[1호],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을 거꾸로 꽂아 둔 예[4호]가 있어 주목된다. 집자리 주변의 적석 유구 중에는 뒷간[化粧室]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소형 강돌들 가운데 큰 마사석(磨砂石) 2개가 놓여 있어 이 돌 위에서 볼일을 본 후 강돌로 뒤처리 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바리 모양 토기[鉢形土器], 항아리 모양 토기[壺形土器], 사발 모양 토기[燔形土器], 붉은 간 토기[丹塗磨硏土器] 등의 토기류가 다수인데, 문양을 가진 토기가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석기는 간 돌 화살촉[磨製石鏃], 돌도끼[石斧], 짧은 배 모양[短舟形] 반달 돌칼[半月形石刀], 가락바퀴[紡錘車], 그물추[漁網錘], 돌끌[石鑿], 홈자귀[有溝石斧], 숫돌[砥石], 갈판[耉石] 등의 석기들도 다량 출토되었다.

[현황]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10여 동의 집터와 많은 양의 토기 및 석기류가 출토되었다. 10여 동의 집터와 다수의 빗살무늬 토기류는 사람들이 정착 생활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잘 다듬은 돌도끼와 돌대패는 움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가공하였음을 보여 준다. 돌보습은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음을 말해 주며, 갈돌과 갈판은 농사지은 곡물류를 요리해서 먹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돌창과 돌촉, 어망추 등은 당시 사람들의 생업 활동을 잘 보여 주는 부분이다. 즉 돌창과 돌촉은 동물 사냥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하고, 어망추는 어로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보고서가 정식으로 출간되지 않아 전모를 알 수는 없으나, 영남의 깊숙한 내륙이자 충청도 지역과 영남 지역의 중간 지점에서 대규모 마을 유적이 조사됨으로써 두 지역 간 문화적 교류뿐 아니라 영남의 문화 형성과 관련되어 동해안 쪽 자료와 비교해 볼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신석기 시대 유구와 유물은 선사 시대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생활 유적, 즉 집터, 무덤, 야외 화덕, 토기를 구운 장소, 석기를 만들었던 장소, 화장실, 쓰레기장 등이 복합적으로 조사되어 더욱 흥미를 끌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생활 유구 속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선사 시대의 토기와 석기의 변천상을 잘 보여 준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영남 서북부 내륙 지역의 문화적 특색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8.05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한자항목명 松竹里 遺跡 ->한자항목명 松竹里 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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