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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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維翰 |
영어음역 | Gwon Eungseong |
이칭/별칭 | 정서룡(鄭瑞龍),인보(仁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손경희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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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정서룡(鄭瑞龍), 자는 인보(仁輔).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 정내신(鄭乃臣)이다.
[활동 사항]
정유한(鄭維翰)[1568~1640]은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효성 우애가 돈독하였다. 13세에 시구(詩句)를 맺을 줄 알았다.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다리에 갑자기 종기가 나서 일어서지를 못할 때 삼촌과 함께 병간호에 치성을 다하였다.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한겨울에 빈소 옆을 떠나지 않아 열손가락이 동상에 걸려 다 터져 진물이 났는데, 13세의 효자라고 인근이 다 칭송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서울에 있다가 왜적이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계신 영남으로 달려갔다.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는 7년간 나랏일에 종사하지 않을 때라 어머니를 모시고 난을 피한 행적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 서울 처가에 있었는데 꿈에 홍의(紅衣) 입은 군인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라 깨고는 왜구의 침략을 근심하였는데, 동래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자 처자(妻子)와 이별하고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모시러 적진을 향해 거꾸로 내려오기까지 한 효자였다.
1592년(선조 25) 7월 7일, 어머니를 모시고 김천시 대항면 대성리 공자동에 있다가 군수 이우빈(李禹賓)의 격문을 보고 분연히 일어나 고향 봉계로 숨어들었다. 장정 150여 명을 모아 창의(倡義)하여 봉계 서북쪽 흑운산(黑雲山)에 진을 쳤다. 9월 초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이 거느린 2,000명의 관군이 개령에 진입한 왜적의 호남 진출을 막기 위해 진군하였다. 이때 정유한은 김산 관군과 합세하여 입석판교(立石板橋)까지 유인하는 데 성공하여 3전 3승의 전과를 올리는 데 일조하였다.
그 뒤 김시민이 진주로 돌아가고 가장(假將) 최기준(崔奇俊) 진영에 머물면서 개령 왜적의 진주 진격을 차단하는 데 협력하였다. 9월 30일에 의병을 이끌고 봉계 태평산(太平山)에 진을 쳤으나, 왜구가 대거 진격하면서 의병을 해산하고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597년(선조 30) 후퇴하던 왜적에게 끝까지 정절을 지키려던 부인 이씨가 무참히 살해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다.
1599년(선조 32) 전쟁이 끝났지만 굶주린 사람들을 돕기 위해 곡식을 황간진(黃澗陣)에 보내는 한편, 자비로 사람과 말을 구해 용산대창(龍山大倉)에 군량미를 우송하기도 하였다. 1624년(인조 2) 2월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의병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나섰다. 1634년(인조 12) 양전(量田)이 시행되자 그 일에 관여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터지자 그해 10월에는 김산의 군기군량(軍器軍糧)을 군기감 정은신(鄭殷臣)으로 하여금 남한산성으로 호송하게 주선하였다. 또한 문경 지역의 군량 보급에 큰 공헌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110일간의 일기인 『고금사적(古今事蹟)』이 있다. 이 일기는 지금은 실전되고 없는 조신(曺伸)의 『백년록(百年錄)』의 체제를 확실하게 알게 해 준다. 임진왜란에서 병자호란까지의 사회상과 사대부의 국가관 및 가정관 등을 소상하게 밝힌 평민의 ‘난중일기’로서 높이 평가된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대항면 태평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나라에서 효행과 충성을 높이 평가하여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증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