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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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片康烈 |
영어음역 | Pyeon Gangryeol |
이칭/별칭 | 애사(愛史)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송호상 |
[정의]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김천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편강렬(片康烈)의 선대는 대대로 경상북도 김천 지역을 본거지로 살아왔으나 할아버지 대에 황해도 연백으로 이주했다. 이런 연유로 편강렬은 1892년 2월 28일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 목동에서 편상훈의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호는 애사(愛史)이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사조약]을 체결하자 전국에서 의병이 발생하였다. 이에 편강렬은 1907년 연고지인 경상도 지방에서 일어난 이강년 의병진의 소집장 겸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경상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전국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자, 편강렬은 중군장 허위의 휘하에서 동대문 밖 30여 리 지점까지 진출하여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귀향하였다.
그 뒤 편강렬은 평양숭실학교에 진학하여 수학하던 중 1910년 일제가 나라를 강점하자 다시 국권 회복을 위해 신민회 황해도지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안명근의 군자금 모금 사건을 단서로 일어난 안악사건으로 1910년 12월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3년여 동안 투옥되었다. 출옥 후인 1914년 편강렬은 김천의 개령면 덕촌으로 내려와 서당을 열고 항일 지사를 육성하는 한편,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결사대와 선전반을 조직하여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편강렬은 한동안의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연안읍에서 사기점을 경영하면서 만세 시위를 계획했으나 일본 경찰의 극심한 감시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3월 15일 이후에야 산발적 시위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후 편강렬은 동생 편덕렬을 상해임시정부에 파견하여 연락을 취하였다. 그리고 동지인 최명식·간병제 등과 함께 황해도 사리원에서 일명 구월산주비단으로 불리는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을 조직하여 안악군 대표로 활동하였다. 군사주비단은 군자금 모금과 상해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을 비롯한 항일 문서 배포 등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시키고 독립군의 국내 진입시 지원 활동을 목표로 하는 단체였다. 그러나 이 비밀 결사는 매국노의 밀고로 탄로 났고, 편강렬은 또다시 체포되어 1919년 9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한 편강렬은 1923년 10월 봉천성 회덕현 오가자에서 양기탁·남정 등과 함께 독립군 단체인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였다. 편강렬은 단장으로 의성단을 이끌면서 장춘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7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적 60여 명을 사살하고 대낮에 봉천 시내에 있는 만철병원을 습격하는 등 무장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만주 지역 독립 운동 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해 만든 전만통일의회주비회에서 활동하던 중 1924년 7월 하얼빈에서 길림으로 가다가 일본 경찰에 포위당해 총격전 끝에 체포되었다,
1925년 편강렬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7년형이 확정되었는데, 당시 재판장에서 앙천대소(仰天大笑)하며 의연하게 의거의 정당성을 외쳐 재판관과 방청객을 놀라게 하였다. 이후 편강렬은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 중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만주안동적십자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1928년 12월 만주 안동현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80년 김천시 남산공원에 ‘의사 편강렬 선생순국기념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