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8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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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銓九 |
영어음역 | Choe Jeongu |
이칭/별칭 | 우서(禹敍),지은(智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169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정성미 |
성격 | 의병|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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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169 |
성별 | 남 |
생년 | 1850년 6월 5일 |
몰년 | 1938년 9월 26일 |
본관 | 전주 |
대표경력 | 광복단 의금부순찰사 |
[정의]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고창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우서(禹敍), 호는 지은(智隱)이다. 1850년 6월 5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169번지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최전구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에 분격하여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이 전라북도 태인[현 정읍 지역]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였다. 이후 최익현 의병대가 순창에서 패전한 뒤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에도 항거를 계속하였다.
1910년 왜적의 침략 행위를 십대죄목(十大罪目)으로 규정하고 일본의 군왕에게 통고문을 보내려다 체포되었다. 이후 욕지도(欲知島)에 1년간 유배되었다. 1911년 동지들을 규합하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고 의금부순찰사로 활동하다 1917년 12월 28일 붙잡혔다. 이로 인해 다시 영종도(永宗島)에 1년간 유폐되었다. 1918년 고종이 죽자 단식 투쟁을 하는 등 10여 차례에 걸친 구검(拘檢)과 2차례의 유폐 생활 끝에 1936년 8월 성송면 학천리 독선재(獨鮮齋)에서 사망하였다.
[저서]
저서로 『남정록(南征錄)』과 『유고(遺稿)』 4권을 남겼다.
[상훈과 추모]
성송면 학천리에 최전구 추모비가 있고,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