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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895
한자 金性洙-
영어음역 Gim Seongsu
영어의미역 Gim Seongsu[Educator]
이칭/별칭 인촌(仁村)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정성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교육가|언론인|정치가|기업가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성별
생년 1891년 10월 11일연표보기
몰년 1955년 2월 18일연표보기
본관 울산
대표경력 한국민주당 당수|동아일보사 사장

[정의]

일제강점기와 현대 고창 출신의 교육가·언론인·정치가·기업가.

[개설]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호는 인촌(仁村)이다. 1891년 10월 11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에서 호남의 거부였던 김경중(金暻中)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3세에 큰아버지인 김기중(金祺中)의 양자가 되었으며, 13세에 고광석(高光錫)과 혼인하였다.

[활동사항]

김성수는 1906년 전라남도 창평에서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영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1908년 전라북도 군산에 있는 금호학교에 다녔다. 그 해 10월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송진우와 함께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와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를 거쳐, 1910년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하여 1914년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인 1919년 1월부터 김성수송진우·현상윤(玄相允) 등과 함께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펼 방책을 꾸며서, 그 뜻이 3·1운동으로 맺어졌다. 민족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세웠으며, 1920년 4월 동아일보사를 창립하였다. 『동아일보』를 통해 1922년에는 물산 장려 운동을 펼치고, 1923년에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펴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힘을 썼다.

1924년 4월 김성수는 친일파 박춘금(朴春琴) 협박 사건으로 동아일보사 간부진이 총사퇴하자 동아일보사를 사임했다가, 같은 해 10월 21일 제5대 동아일보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26년 6월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 소속 학생들과 중앙학교 학생들이 만든 격문에 이름이 기재되어 일본 경찰에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5년 1월 김성수는 민족 문화 보급을 위한 사업으로 이윤재(李允宰)·이극노(李克魯)·이은상(李殷相)·이종린(李鍾麟)·안재홍(安在鴻)·이인 등과 함께 조선기념도서출판관(朝鮮紀念圖書出版館)을 발기하여 초대 관장에 선출된 뒤 첫 번째 사업으로 『조선문자급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를 간행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1938년에는 친일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동(同) 연맹 산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이후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0]·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을 역임하면서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거나 강연 등을 하여 현재 친일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수석 고문관을 거쳐, 1946년 한국민주당 수석총무·총재, 동아일보사 9대 사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1947년 신탁통치반대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1949년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이 되어 1951년 2대 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이승만(李承晩) 독재에 반대하여 이듬해 5월 사임하였다. 같은 해 12월 민주국민당 고문이 되었으며, 그 후 야당에서 활약하였다.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 정기를 세우는 국회위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으나, 유족 등 관련 단체에서는 반발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산8-1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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