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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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殊寺 |
영어음역 | Munsusa |
영어의미역 | Munsu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48[칠성길 135]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배옥영 |
성격 | 사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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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연도/일시 | 신라시대 |
창건자 | 자장율사 |
전화 | 063-562-0502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 소속 사찰.
[개설]
고창군의 진산인 방장산(方丈山)에서 남북을 가르며 서남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우뚝 선 문수산[621.1m]의 북쪽 기슭[높이 320m]에 자리 잡은 문수사는 사적기에 의하면 643년(의자왕 3)에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건립경위 및 변천]
문수산에는 여러 가지 명칭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우리산(牛利山),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서는 문수산,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축령산[鷲嶺山], 또는 청량산 등으로 부르고 있다. 문수산, 청량산 등은 절 이름에서 뜻하는 것처럼 문수보살과 인연이 있는 이름이다.
문수사의 창건 설화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당나라 청량산에 들어가 삼칠일 기도를 거듭한 끝에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깨닫고 귀국하여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가만히 보니 산세와 수세(水勢)가 중국의 청량산과 너무도 흡사한 것을 기이하게 여긴 자장율사는 문수산 기슭의 암굴(岩窟)을 찾아 7일 기도를 올렸는데, 그때 문수보살이 땅속에서 솟아나는 꿈을 꾸게 되어 땅을 파보니 화강석의 장대한 문수보살 입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곳에 절을 세우고 문수사라 이름을 지었다. 이로부터 축령산을 문수산, 청량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문수보살상에 얽힌 전설적 의미와 문수도량의 창건 연기에 의해서 대웅전보다는 문수전에 주전(主殿)의 비중을 더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건너간 것은 636년(선덕왕 5)이며, 그로부터 8년 후에 귀국했다. 백제, 신라 두 나라가 정치적으로 심하게 대립되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과연 자장율사가 이곳을 통과하였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신라 고승이 백제 땅에 와서 절을 세웠다는 기록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당시 불교의 사세를 보면 수긍이 가는 일면도 있다. 그러나 사적기에도 그 같은 창건 설화를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어 어쨌든 이를 감안해야 할 듯하다.
문수사는 창건 이후 고려시대 때의 역사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경우, 「축령산문수사중건사적」, 「문수사한산전중창상량문」, 「축령산문수사내원초창상량문」을 통해서 문수사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이 사적기를 종합해 보면, 1607년(선조 40)에 절을 중건했다 하나 자세하지 않으며, 1653년(효종 4)에 성오대사와 승려 상유(尙裕)가 대웅전을 중창함과 동시에 대웅전의 삼존불을 조성하고, 명부전 시왕상의 단청을 했다.
문수사는 이후 2차에 걸쳐 더 중수되었는데, 1764년(영조 40)에는 신화(信和), 쾌영(快英) 두 승려가 선운사로부터 이곳으로 이주하여 1차 중수를 하였고, 대웅전 뒤에 있는 양진암(養眞庵)도 신화, 쾌영 두 승려가 대웅전을 중수하면서 함께 창건했다. 그 뒤 1835년(헌종 1)에 당시 문수사 주지였던 우홍(牛弘)이 2차 중수를 하였다. 이후 1876년(고종 13)에는 고창현감 김성로(金星老)의 시주로 승려 묵암(默庵)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승려 경만, 재석이 주석하면서 여러 차례 기와 및 단청 불사를 하였고, 법연이 1989년에 칠성각을 지었다. 현 주지인 서경은 1997년에 고창군의 지원을 받아 한산전을 해체, 복원하였고, 범종각과 범종을 조성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사적기에도 문수사에 대한 조선 전기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문수사에 대한 조선 전기의 역사나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문수사에서 발간한 목판본을 통해서이다.
[활동사항]
문수사에서 발간한 목판본으로는 1411년(태종 11)에 간행된 『대전화상주심경(大顚和尙注心經)』과 1424년(세종 6)에 간행된 『영가진각선사증도가(永嘉眞覺禪師證道歌)』와 1534년(중종 29)에 간행된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 등이 있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소멸해 가는 시기에 불교와 관련된 서적을 간행하였던 것을 보면, 조선 전기 문수사의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개항기에는 장성(長城) 사람인 기삼연(奇參衍)이 1906년(고종 43) 9월에 장성 수연산(隨緣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다른 지역의 여러 의병들과 함께 동맹하여 9월 23일에 문수사에서 적들과 교전하여 크게 이겼다 한다. 이렇듯 문수사는 불법을 통하여 중생 구제에만 힘쓴 것이 아니라, 나라가 위기에 처한 어려운 시기에는 구국의 선봉 기지 역할도 하였다.
[관련문화재]
문수사 부도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4호이다. 부도들은 받침대에서부터 맨 위의 덮개돌까지 모두 8각으로 이루어졌으며, 높이는 대략 2.5m 내외이다. 받침대 면에는 안상(眼象)을 새겼으며, 가운데에는 연꽃무늬를 장식하였다. 몸체는 모두 하나의 돌로 만들었고, 별다른 장식은 없다. 부도들 중 정면에 태극무늬를 새겨 빗장처럼 보이게 한 것이 특이하다. 대부분의 부도는 받침대 부분을 안정적으로 처리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문수사 어귀에 있는 고창 문수사 단풍나무숲은 천연기념물 제463호로, 문수사 대웅전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1호로, 문수사 문수전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문수사 목조삼세불상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07호로, 문수사 목조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