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1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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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華寺 |
영어음역 | Yonghwasa |
영어의미역 | Yonghwa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연동리 산 57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배옥영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연동리에 있는 한국불교태고종 소속 사찰.
[개설]
1950년에 승려 서만혜와 보살 하종례가 한날한시에 같은 꿈을 꾸었으며, 그 꿈속에서 미륵보살에게 “야산에 내가 있으니 모셔다 절을 창건하라”는 마정수기(摩頂授記)를 받아 미륵도량으로 용화사(龍華寺)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건립경위 및 변천]
용화사는 1950년에 창건되었다. 661㎡의 대지 위에 대웅전, 미륵전, 요사와 용화사 오층석탑이 있다. 1972년 7월 5일 한국불교 태고종에 등록하였다. 초대 주지인 서만혜는 대웅전과 꿈속에 나타난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과 요사를 창건하여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 뒤를 이어 고대근, 김철봉, 이종남이 주지가 되었으며, 사찰의 면모를 갖추어나갔다.
1982년에는 승려 정법운이 대웅전을 늘려 짓고, 종각을 새로 지어 범종을 조성했다. 또한 부처의 진신사리를 스리랑카에서 가져와 용화사 오층석탑을 세웠다. 그리고 부처의 지혜로 암흑의 세계를 비춘다는 2기의 석등과, 인류의 평화와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평화통일기원비’를 세웠다. 이어서 용화사의 창건주 서만혜와 하종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웠다.
용화사 주지 정법운은 2005년 태고종 전북종무원장에 당선되어 전라북도 내에 있는 태고종 사찰 220곳을 관장하게 되었다. 법운은 “첫 번째 목표를 종도 화합에 두겠다”며, 종도 화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현황]
용화사는 영험한 석조미륵불상이 있는 미륵도량이다. 당우로는 대웅전과 미륵전, 요사, 범종각이 있다. 대웅전에는 불상 금동보살상, 석가모니불좌상, 관세음보살상이 있고, 미륵전에는 미륵불이 있다. 불화로는 석가모니불,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칠성탱화, 신상탱화,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있다.
흰 눈이 온 천지를 덮은 날 용화사를 찾아가면 사찰을 찾아가는 길도 하얗고, 하늘도 하얗고, 산도 하얗고, 온통 하얀 눈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설국(雪國)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으로 용화사에 이르면 가장 먼저 맞아주는 것은 유난히 고색창연한 범종각이다. 매우 아름다운 조각과 퇴락했으나 옛날의 영화를 알려주는 단청이 흰 눈 속에서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이 범종각은 원래 전라남도 영광군의 어느 사찰에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 때 뜯어서 전라남도 영광 서여자중학교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하며, 원래 2층이던 것을 1층으로 세웠다.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톨게이트로 나와서 영광IC 삼거리에서 국도 23호선을 타고 고창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3.5㎞ 정도 주행하면 춘산교차로에 도착하게 된다. 춘산교차로에서 대산, 용화사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200m 정도 주행하면 시등사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해룡, 용화사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1.5㎞ 정도 주행하면 대산초등학교에 도착한다. 이곳을 지나 1㎞ 정도 주행하면 연동마을 정류소, 용화사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연동마을 정류소에서 용화사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좁은 도로로 200m 정도 들어가 오른쪽으로 300m 정도 길을 따라 내려가면 용화사에 도착하게 된다.
[관련문화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3호로 지정된 용화사 미륵불상이 있다. 미륵전에 본존으로 안치되어 있는 불상으로, 무릎 이하 아래 부분이 땅속에 묻혀 있어 전체 높이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높이는 약 185㎝ 정도이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용화사 오층석탑의 규모는 높이 700㎝, 기단은 각 250㎝이며, 1987년에 승려 정법운이 세웠다. 탑의 기단부에는 8부신중이 조각되어 있으며, 1층 부분에는 동서남북으로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탑에 있는 부처의 진신사리는 승려 서경보를 통해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사리 1과이다. 불상은 두툼한 돌을 이용하여 뒷부분은 원형 그대로 다듬지 않고 두었으며, 앞부분은 조각을 기하였지만 전체적으로 평면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측면에서 보면 상당한 중량감이 느껴지는 불상이다.
머리에는 지붕돌 모양의 커다란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윗부분을 구슬 모양으로 처리하였다.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육계는 분명치 않지만, 그 부분이 높게 솟아 보관을 받고 있다. 전체적으로 길쭉한 얼굴에 유난히 큰 귀가 눈에 띄며, 얼굴은 마모가 심하여 잘 알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눈 부분은 움푹 들어가 있어 상대적으로 눈동자가 튀어나와 보이며, 약간 벌어진 입은 아주 작으면서도 해학적으로 표현되었다.
가슴 부근에는 두 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기 위하여 팔 안쪽 부분을 의도적으로 갈아낸 흔적이 있으나, 후대에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불신은 허리 아래 부분에서 두 동강이가 나 시멘트로 붙여놓은 상태이지만, 그 아래로 무릎과 발 부분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얼굴이 크고 신체 표현이 빈약한 거불(巨佛)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하부가 매몰되어 알 수는 없지만 괴체적인 신체 표현과 생략화된 세부 표현, 지붕돌 모양의 보관 등에서 고려시대 이후 거불의 전통을 계승한 조선 후기의 석불로 생각된다. 친근감이 있고 해학적인 독특한 석불의 표현과 민간신앙이나 무속신앙과 불교신앙과의 습합(習合)을 이루어가는 단면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