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1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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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山祠 |
영어음역 | Namsansa |
영어의미역 | Namsansa Shrine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송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범호 |
성격 |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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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우진각지붕 |
건립시기/일시 | 1830년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2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송산리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송산리에 있는 김유신, 김축, 김두남, 김지남 을 향사하는 조선 후기 사당.
[개설]
남산사는 1830년(순조 30)에 창건하여 김유신(金庾信), 김축(金軸), 김두남(金斗南), 김지남(金志南) 등을 향사하고 있다. 김유신은 신라의 장군으로 본관은 가락이며,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13세손이다. 신라 김춘추를 임금으로 추대하였고, 660년(태종무열왕 7) 상대등이 되어 당나라 소정방과 병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나당 연합군의 대총관이 되었다. 고구려를 정벌한 후에는 당나라 군사를 고구려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한강 이북의 고구려 옛 땅을 되찾았다. 835년(흥덕왕 10)에 흥무대왕의 칭호를 주어 임금 대우를 하였다.
김축은 절효공(節孝公) 김극일의 현손(玄孫)으로 본관은 김해이다. 임진왜란 당시 80세의 고령임에도 아들 김기경(金起庚)과 아우 김헌(金軒)의 아들인 김두남과 김지남 등을 데리고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 웅치전투와 이치전투를 거쳐 전라도로 가서 1593년(선조 26)에 진양(晋陽)[현 진주]을 버리고 도망하는 관병이 충의가 없는 것에 분개하고 김천일의 대의(大義)에 동맹하였다. 이에 합심하여 성을 방어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손자 김영립(金榮立)을 시켜 도체찰사 김관(金瓘)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원병이 미처 오기 전에 이들 모두가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위치]
해리면 송산리 임해마을에 있다. 남산사는 임해마을 아래뜸 뒤쪽의 야산 기슭에 있다.
[변천]
1830년에 창건하여 여러 번의 중·개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슬레이트 지붕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