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6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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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凱歌場-由來 |
영어음역 | Gaega Jangteoui Yurae |
영어의미역 | Origin of Gaega Market's Site |
이칭/별칭 | 「개가리 장터 이야기」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석교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손앵화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석교리에서 개가장터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개가장터의 유래」는 공음면 석교리에 세워져 성해 오다가 일제 강점기에 폐쇄된 개가리 장터의 유래에 대한 지명전설이다. 또한 눈길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제사 음식을 구하러 멀리 안자시장[현 해리시장]까지 가는 영모당(永慕堂) 김질(金質)[1496~1561]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무장 원님이 개가리에 장을 세워 주었다는 효행담이기도 하다. 이를 「개가리 장터 이야기」라고도 한다. 개가리 장터는 일제 강점기에는 의병 활동의 거점이 되었기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었다고 한다.
[채록/수집상황]
1992년 고창군지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고창군지』 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조선 시대 무장과 법성창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 창촌이 있고, 그 동남간에 당시에 크게 번성했던 개갑장터가 있었다. 그때 이 고장의 출천지효로 이름나 있는 영모당 김질이 있었다. 김질은 안동김씨이며 1496년에 공음면 칠암리 개가에서 출생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상과 조부모의 승중상 도합 12년간을 시묘살이를 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에 꿩고기를 몹시 좋아했기에 그는 매년 12월 제삿날에는 짚신을 삼아 그곳에서 8㎞나 되는 안자시장에 가서 짚신을 팔아 꿩을 사서 제물로 쓰곤 하였다.
어느 해 눈이 많이 내려 시장이 서지 않아 제물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크게 걱정하면서 그의 불효로 인하여 하늘이 내린 벌로 알고 제삿날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눈이 많이 내린 그날 석양 무렵에 갑자기 꿩 한 마리가 부엌으로 날아 들어와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 김질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 꿩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모셨다. 그 다음 해에도 짚신을 등에 지고 눈길을 헤쳐 제물을 구하기 위하여 해리시장에 가는 도중 때마침 무장 원님이 그곳을 행차하다가 김질의 모습을 보고 이 추운 날씨에 무엇 하러 가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원님은 김질의 효성이 지극함을 극찬하고는 그를 위하여 개가리에 장을 세워 주었고, 김질은 평생 동안 눈길에 시장을 보러 가는 고생을 덜게 되었다.
그 뒤로 성해 오던 개가리 장터는 한일합방 후 구한말의 의병 활동을 위한 보급소와 연락처로 낙인이 찍혀 일본 사람들이 중앙지가 아니라는 이유를 내세워 끝내 폐쇄하여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모티프 분석]
「개가장터의 유래」의 주요 모티프는 ‘스스로 제물이 된 꿩’, ‘하늘을 감동시킨 효자’이다. 영모당 김질의 효행이 하늘을 감동시켜 이적을 보이는 것과, 사람을 감동시켜 일종의 포상을 받는 등 두 가지가 나타나 있다. 전자는 제사에 쓸 꿩고기를 구할 수 없자 꿩이 스스로 날아들었다는 내용이며, 후자는 무장원님이 개가리 장터를 세워 주었다는 내용이다. 조선조에 이르면 유교의 조상숭배 사상의 영향으로 죽은 조상에 대한 효도인 제사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그에 따라 3년의 시묘살이가 자식 된 이의 당연한 도리로 자리 잡았고, 물심양면으로 제사에 정성을 쏟았다. 「개가장터의 유래」는 이처럼 제사가 효의 주요한 부분이 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