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6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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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山寺 |
영어음역 | Jeolteoman Nameun Seongsansa |
영어의미역 | Seongsansa Temple Only Remaining Site |
이칭/별칭 | 「절터뿐인 성산사」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 |
집필자 | 임세경 |
성격 | 지명 전설|사찰 폐사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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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 | 승려|봉씨|고구려 고승 |
관련지명 | 성산사|증산마을 |
모티프 유형 | 양반의 횡포로 인한 폐사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에서 성산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절터만 남은 성산사」는 절터만 남은 성산사에 얽힌 지명 전설이다. 이를 「절터뿐인 성산사」라고도 한다. 고수면 부곡리에는 성산사의 옛 터가 쓸쓸하게 흔적만 남아 있다.
[채록/수집상황]
1992년 고창군지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고창군지』에 실려 있으며, 2009년 고창군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고창군지』에 「절터뿐인 성산사」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
성산사 절터의 뒷마을 이름이 증산인데, 승려들이 붐벼서 증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아주 오랜 옛날 증산마을에 봉씨 한 사람이 높은 벼슬을 지내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성산사의 승려들이 문안 인사를 하지 않으려고 하나 둘씩 절을 버리고 멀리 떠나버렸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높은 벼슬을 했다는 봉씨는 조선 시대의 세도가로서 당시 숭유척불사상을 떠올리며 승려들을 괴롭힌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절터 주변의 들판을 성산이라고 하며, 절터에 있는 연못을 성산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사찰 이름이 성산사로 생각된다. 이 절은 이름 높은 사찰이어서 고승들의 수도처였다고 한다. 예부터 고승이 거주하는 곳에는 돌로 만든 말을 세워 절의 입구를 밝히곤 했다. 그런데 약 40여 년 전에 일본 사람이 이 석마를 가져가고 현재는 말고삐를 매는 돌로 만든 말뚝만 남아 있다. 이 절터에는 상반신이 없는 석불이 있는데, 상반신은 증산마을에서 학독을 만들었으며, 이 학독을 만든 이는 눈이 멀었다고 한다.
이 절을 처음 세운 사람은 고구려의 고승으로서 고구려 장수왕의 오해를 사서 남으로 피신해 왔다고 한다. 그때 비둘기 한 마리가 고승을 안내하여 성산에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터만 남은 이곳은 우리의 전통적인 불교유적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곳으로 지금도 많은 기와 조각이 나오고 있다. 이 기와는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상반신이 없는 석불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모티프 분석]
「절터만남은 성산사」의 주요 모티프는 ‘양반의 횡포로 인한 폐사’이다. 성산사의 흔적으로 돌로 만든 말뚝과 상반신이 없는 석불, 기와 조각 등을 통해 예전 성산사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사찰 폐사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