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6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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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喜政丞- |
영어음역 | Hwanghui Jeongseung Iyagi |
영어의미역 | The Tale of Hwang hui Chief Minister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은영 |
[정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황희 정승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황희 정승 이야기」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 때의 실존 인물로 청렴결백한 정승으로서 명성이 높았던 황희(黃喜)[1363~1452]에 관한 이야기이다. 황희는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태조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세종의 치세 하에서 18년 간 영의정에 재임하였고, 어진 인품과 청렴한 생활 태도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에 대해서는 여러 다양한 설화가 전해지는데, 고창에서 채록한 「황희 정승 이야기」를 내용에 따라 구분하면 「농부로부터 가르침을 얻은 황희」, 「두문동과 황희」, 「청백리 황희 정승」, 「종의 아이들에게도 인자한 황희 정승」, 「공작새의 먹이를 알아낸 황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채록/수집상황]
1993년 박순호가 집필하고 고창군에서 발행한 『고창군구비문학대계』상에 실려 있다. 이는 박순호가 1990년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와 해리면 왕촌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여러 각 편을 수집·채록한 것이다.
[내용]
1. 「농부로부터 가르침을 얻은 황희」
정승이 되기 전 황희가 길을 가다 두 마리의 소로 밭을 가는 농부를 보고는 어떤 소가 더 일을 잘 하느냐고 물었다. 농부는 귓속말로 일을 더 잘하는 소를 알려주고 나서, 미물도 자신이 모자란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어서 귓속말을 했다고 말했다. 황희는 농부의 태도에서 큰 가르침을 받고는 이후 함부로 남의 말을 하지 않았다.
2. 「두문동과 황희」
고려 유신들이 모여 살던 두문동에서 나온 황희는 조선의 관리가 되었다. 어느 날 길에서 한 거지를 만난 황희는 그를 반갑게 맞아 자기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는 의복과 식량을 챙겨 하인을 시켜 배웅케 했는데, 산모퉁이에서 그 사람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 거지는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었다.
3. 「청백리 황희 정승」
청렴결백한 황희 정승은 집이 가난하여 방안에서도 새는 비를 피하려고 삿갓을 쓰고 있곤 했다. 황희 정승의 아내와 딸은 옷이 없어서 치마 한 벌을 서로 돌려가며 바꿔 입고 살았다. 달걀이 들어왔는데 먹지 않고 두어서 계란에 뼈가 생겼다. 이로부터 ‘계란유골’이란 말이 생겨났다.
4.「종의 아이들에게도 인자한 황희 정승」
황희 정승의 집에 손님이 들어 대접을 하는데 종의 아이들이 황희의 수염을 만지고 음식을 집어 먹었다. 어이가 없어진 손님이 그 아이들을 그냥 두느냐고 묻자 황희는 그 아이들도 하늘에서 내린 아이들이라며 인자한 태도를 보였다.
5. 「공작새의 먹이를 알아낸 황희」
황희 정승이 죽은 후의 이야기이다. 중국에서 새를 보내 왔는데 새가 먹이를 먹지 않아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황희 정승의 부인에게 정승이 돌아가시면서 남긴 말이 없느냐고 물어 보았다. 부인은 황희 정승의 말을 기억하여 전했고, 그 말 대로 거미를 잡아 먹여 공작새를 살렸다.
[모티프 분석]
「황희 정승 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농부의 지혜’, ‘청빈과 청백리’, ‘의리와 인자’ 등이다. 황희는 청백리의 표상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신분이 미천한 농부로부터 가르침을 얻고, 두문동에 사는 고려 유신들에게 의리를 지켰으며, 종의 아이들에게도 인자하다. 이야기 속에서 황희는 자신과 가족에게는 엄격한 인물이며, 청빈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