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8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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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庾碩 |
영어음역 | Yu Seo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권순형 |
[정의]
고려 후기 고창 출신의 문신이자 양리(良吏).
[가계]
본관은 무송(茂松). 증조할아버지는 의종(毅宗) 때 재상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유필(庾弼)이며, 할아버지는 명종(明宗) 때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낸 유응규(庾應圭)이다. 아버지는 강종(康宗) 때 병마부사를 지낸 유세겸(庾世謙)이다.
[활동사항]
유석(庾碩)은 1216년(고종 3) 과거에 장원 급제 후, 내시(內侍)에 임명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이 되었다. 또 충청도와 전라도 2도의 안찰사와 동남도도지휘부사(東南道都指揮副使)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좋은 업적으로 명성을 남겼다. 유석은 평소 성격이 강직하고 청백하여 권세 있는 고관에게 아부하지 않아 사소한 잘못으로 누차 쫓겨났으나 자기 절조(節操)를 지키고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안동도호부사(安東都護副使)로 있을 때 순문사(巡問使) 송국첨(宋國瞻)이 유석에게 판관 신저(申著)와 협의해 고을 산성을 수축하라고 명하였다. 유석은 신저가 평소에 탐오하였으므로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따르지 않았다. 이에 신저는 유석을 비방하여 나주의 암타도(巖墮島)로 귀양 가게 하였다. 유석이 귀양지로 떠날 때 고을 사람들은 어른 아이 없이 길을 막고 울며 매달렸다. 말이 부족하여 가족 중 걷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고을 사람들이 말을 내어주자 유석의 처는 “우리 주인이 귀양 가니 처자도 모두 죄인입니다. 어찌 사람과 말을 괴롭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이 부인 아니고서야 어찌 그분의 배필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감탄하였다.
그 후 다시 등용되어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는데, 동북면에서는 그전에 어떤 병마사가 강요주(江瑤珠)[꼬막]를 최이(崔怡)[최충헌의 아들]에게 뇌물로 주기 시작하여 이것이 전례가 되었다. 강요주는 해물(海物)로 용진현(龍津縣)에서 났는데 잡기가 매우 어려웠으며, 이로 인해 고을 사람들이 거의 다 도망쳐 흩어졌다. 이러한 사정을 안 유석이 이를 완전히 금지하자 도망갔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왔다. 또 그때 수령들이 경쟁적으로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여 권력자들에게 아첨을 일삼았는데, 유석이 공문을 내려 이를 금하였다. 이에 동북면 사람들이 그를 ‘어버이’라고 불렀다.
최이의 아들 최항(崔沆)이 정권을 물려받은 뒤 인망을 얻고자 유석을 지형부사(知刑部事)로 조정에 불러들였다. 1250년(고종 37) 상장군 김보정(金寶鼎)이 타인의 노비를 빼앗기 위하여 송사를 제기하였는데 유석은 바로 그 허위를 간파하고 판결하였다. 또 대장군 이보(李輔)도 어느 진사(進士)와 노비 문제로 다투면서 진사를 무고하였으나 이 역시 허위임을 밝혔다. 이에 김보정과 이보가 최항에게 호소하여 유석은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副使)로 강직되었으며,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훗날 안동(安東) 수령 박유저(朴惟氐)가 자기의 정사가 유석만 못하지 않다고 자인하며 한 아전을 보고 “백성들이 나를 유사또와 비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그 아전은 “백성들이 유사또를 칭찬합니다”라고 하고 조금 뒤에야 박유저에 대하여도 언급하였다. 이에 박유저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유석에 대하여 감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