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310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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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仁雨 |
영어공식명칭 | Kim Inwo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병렬 |
활동 시기/일시 | 1374년 - 김인우 장사감무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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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활동지 | 장사현 -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해리면|심원면|공음면 |
묘소|단소 | 김인우 묘소 - 개성특별시 |
사당|배향지 | 화동서원 -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 734-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광산 |
대표 관직 | 전리판서|장사감무 |
[정의]
고려 후기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김양감(金良鑑)의 11세손으로 양간공(良簡公) 김연(金璉)의 현손이다. 김인우는 4남 중 맏아들이다. 매은공 김오행(金五行)이 김인우의 손자로, 고려가 망하자 선대의 유훈을 좇아 의리를 지키고 부모에게 효도를 다한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다.
[활동 사항]
김인우(金仁雨)는 전리판서(典理判書)와 왕명의 출납, 궁궐의 경호 및 군사 기밀 따위의 일을 보는 밀직사(密直司)의 부사(副使)를 역임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10월 10여만 명의 홍건적 무리가 압록강을 건너와 삭주를 침범하였을 때, 추밀원부사 이방실(李芳實)을 따라 서북면[현 평안도]에서 격퇴하였다. 1362년(공민왕 11) 1월 안우(安祐)·이방실·황상(黃裳)·한방신(韓方信)·이여경(李餘慶)·김득배(金得培)·안우(安遇)·이구수(李龜壽)·최영(崔瑩) 등과 함께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개성 동쪽 외곽에 진을 치고 홍건적과 대치하였다. 이때 이성계(李成桂)가 휘하 친병 2,000명으로 홍건적을 참살하고 난을 평정하였다. 1363년(공민왕 20)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위한 공을 인정받아 일등공신에 기록되었고, 문관의 선임·공훈·예의·제향·조회·학교·과거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서의 우두머리인 봉익대부(奉翊大夫) 전리판서에 이르렀다.
1372년(공민왕 21) 고려가 명나라에 탐라[제주도의 옛 이름]의 말을 조공하기로 하였다. 당시 김인우의 아우 김갑우가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으로 천추사가 되어 탐라 말 50필을 이끌고 가는 도중에 2마리를 잃게 되었다. 말이 부족하자 김갑우는 자신의 말까지 채워 바치고 그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1374년(공민왕 23) 정비(鄭庇) 등이 남경에서 돌아올 때 명나라에서 외교문서를 보냈는데, 김갑우가 보낸 공마들이 모두 타지 못할 것들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김갑우는 역관 오극충(吳克忠)과 함께 그해 7월 처형되었다. 김인우도 화를 입어 장사현과 인접한 무송현을 함께 관할하는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어 고창 지역으로 내려오면서 광산 김씨 입향조가 되었다. 한편, 김인우가 장사감무로 좌천된 것은 평소 왕에게 직언을 많이 하여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묘소]
김인우의 묘소는 북한 개성특별시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상훈과 추모]
무장 고을 선비들이 김인우를 사모하여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에 있는 화동서원(華東書院)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