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6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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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穆-李世璋遺蹟 |
영어의미역 | Remains of Yi Mok, Yi Seja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내수 |
성격 | 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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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연도 | 1564년[묘표]|1666년[묘갈] |
관련인물 | 이목|이세장 |
높이 | 괴석 93㎝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
소유자 | 전주이씨 정간공 한재종중 |
관리자 | 전주이씨 정간공 한재종중 |
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남도 기념물 제21호 |
문화재 지정일 | 1997년 6월 5일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에 있는 조선 중기 이목과 아들인 이세장과 관련된 유적.
[개설]
이목(李穆)[1471~1498]은 반포면 충현서원에도 제향된 인물로 조선 전기 호서의 사림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중옹(仲雍), 호는 한재(寒齋),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9세로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1495년 25세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에서 사사했으며, 태학생으로 있던 1490년(성종 21)에 대비가 음사를 설치하고 무당을 불러들이자 앞장서서 논척하여 이를 물리쳤다. 또한 나라에 기근이 들자 당시의 재상이었던 윤필상(尹弼商)의 전횡때문이라고 격렬히 탄핵하다가 공주의 씨악섬(현재 공주시 소학동)으로 유배당하였다. 그후 무오사화 때 28세의 젊은 나이로 김일손·권오복 등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이세장(李世璋)[1497~1562]은 1516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1524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뒤, 사헌부 지평·장령·집의, 홍문관 교리·응교, 승정원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시강원에서 강론하기도 하였다. 명종 대에는 홍문관 부제학, 승정원 부승지·좌승지, 예조참의·도승지, 호조참의,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평생 청렴한 관직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1551년(명종 6) 염근인 33인을 녹선할 때 이세장도 퇴계 이황과 나란히 뽑히고 있다. 실록에서 이세장에 대해 평하기를, ‘수졸(守拙)로 세상을 살아 외물에 거슬리지 않았으며, 집이 몹시 궁색하여 조석거리가 없었지만 생산에 뜻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치]
공주시 종합터미널에서 국도 32호선으로 예산(청양) 방면으로 연미터널을 지나면 바로 오른쪽으로 길게 펼쳐진 우성면 내산리가 있다. 내산리는 전주이씨 정간공(貞簡公) 한재종중(寒齋宗中)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괴석이 있으며, 마을 뒷산에 묘소와 묘비 등이 위치한다.
[형태]
유적은 이세장의 모친인 예안김씨의 묘소, 이세장의 묘소와 괴석, 1963년 공주 유림의 건의로 건립한 한재유적비(寒齋遺蹟碑) 등이 있다. 이세장의 묘소에는 1564년 건립된 묘표와 1666년 건립된 묘갈이 있다. 묘갈문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 찬했으며, 전액(篆額)은 서곡(西谷) 이정영(李正英)이 썼고, 글씨는 이양환(李陽煥)이 썼다.
이세장과 관련된 괴석은 방형의 화강석 위에 93㎝의 높이로 있으며, 그 오른쪽에는 이 괴석의 유래를 알려주는 성구용(成九鏞)이 찬한 「괴석명병소서(怪石銘幷小敍)」 비가 있다. 이 비석에 의하면, 이 괴석은 이세장이 강원도관찰사로 재임할 당시 정원에 놓고 아끼던 것이었다고 한다.
이세장은 매우 청렴하여 임금이 ‘청백(淸白)’이란 두 글자를 하사할 정도로 뇌물을 받지 않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어느 날 부채 하나가 선물로 들어오자 이것도 옳지 못한 것이라 하여 강에 버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강원도 사람들이 공의 선정에 보답하고자 많은 선물을 바쳤으나, 이세장이 모두 거절하자 주민들은 1554년 평소에 공이 아끼던 괴석을 기념으로 이세장의 집(장기 당암리)에 옮겨주었다고 한다. 한재유적비는 성구겸(成九鎌)이 찬하였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