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1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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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錦江水運 |
영어음역 | Geumgangsuun |
영어의미역 | Geumgang Water Traffic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 |
집필자 | 정내수 |
[정의]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충청남도 공주에서 금강 수계를 이용하여 발달했던 수운.
[개설]
조선시대에 공주 지역은 충청도 일대의 수위 도시로서 금강과 주변의 산지들이 방어 기지가 되는 군사적 요충지였고, 금강수운의 주요 하천 항구였다. 공주시의 주요 도시 기능 가운데, 교육과 교통 기능의 원형은 대체로 일제강점기에 부여된 것인데, 이는 조선시대의 도시 기능과도 관련되어 있다.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제외하고, 규모가 큰 도시들은 대부분이 지방 행정 중심지, 군사적 요충지, 내륙 수운의 하천 항구 등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 중심지들은 배산임수나 분지 지형상의 풍수지리상 길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조선시대의 공주 지역은 이러한 기능을 모두 가진 대표적 사례이다. 공주 지역은 조선시대 내내 충청도 일대의 수위 도시로서 금강과 주변의 산지들이 방어 기지가 되는 군사적 요충지였고, 금강수운의 주요 하천 항구였다.
[공주의 교통 및 상업 발달]
조선시대 공주 지역은 감영 도시로서의 이점(利點) 이외에 금강 수계와 사통팔달의 도로망 덕택에 개항 이전부터 강경·논산·예산·둔포 등과 함께 독자적인 상품 유통권을 가진 상업 중심지로 정평이 나 있었다. 공주의 젖줄인 금강은 주변 연안의 농업 환경이 양호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인구 밀집 도시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수운로(水運路)로서 주목을 받았다.
조선 말기 일본인들의 조사에 따르면, 금강 발원지로부터 3백 리 떨어진 내륙 수로의 종점인 연기군 부강까지는 물이 얕아 수운의 편리가 없었으나, 부강부터 군산까지는 배가 오르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금강의 경우는 조류(潮流)의 영향이 부여 지역까지 미쳐 이를 이용할 경우, 선박의 운항 시간이나 노임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으며, 동계 결빙 기간도 한강 수계보다는 짧아서 이용도가 매우 높은 수계였다고 한다.
당시 군산에서 강경까지는 만조 때는 벼 400~500석, 간조 때는 300~400석, 그리고 군산에서 공주나 부강까지는 벼 40~50석 정도를 실은 범선[平底船]들이 금강 수계를 오르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1910년 당시, 공주 백제대교(신다리) 밑의 수심은 2.5m, 금강철교(구다리) 쪽은 3.5m, 곰나루 건너편(연미산) 쪽은 5m 정도였다.
실개천으로 변화한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나 1900년대에 금강 수계를 왕래하던 선박 숫자는 매년 1만 5천 척 정도였으며, 군산~강경~공주~부강 구간에는 정기 기선도 운항하고 있었다. 당시 평저선인 범선의 경우는 군산에서 공주까지 이틀, 그 반대로 공주에서 군산까지는 하루 정도가 걸렸으며, 기선의 경우에는 군산에서 부강까지는 8시간, 그 반대는 5시간 정도가 걸렸다. 1910년 5월과 9월 공주와 군산 간에는 제일공주환(第一公州丸)과 제이공주환이 각각 개통되었는데, 당시 한 사람당 운임은 1원 50전, 쌀은 석당(石當) 25전이었다.
이처럼 금강수운이 번성했기 때문에 공주를 비롯하여 정산·부여·홍산·석성 등지의 물산들은 육로가 아니라 주로 금강 수계의 뱃길을 따라 운송되었다. 특히 경부선 부강역의 철도와 수운을 통해 육지 것과 바다 것이 서로 교환되던 부강 지역의 구들기나루는 조선 말기 부자가 많기로 소문이 난 곳이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경기가 한창 좋을 때는 장날만 되면 약 200여 척의 배가 구들기나루에 정박하였으며, 음식점만 해도 70여 개에 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해태로 불쏘시개를 하고, 명태로 부지깽이를 삼았다는 회고담은 당시 구들기나루가 얼마나 흥청대던 하안포구(河岸浦口)였는가를 잘 말해준다.
당시 공주에서 소상백화(遡上百貨)가 폭주하며 상업이 가장 번창했던 곳은 역시 곰나루(당시는 남부면이고 현재는 웅진동), 전막(全幕)[신관동 금강교 부근], 장깃대나루(옥룡동 백제대교 부근) 등이었다. 회고에 따르면, 상당수의 공주 지역 부자들은 위의 나루들을 근거지로 삼아 소금과 어물을 통한 상업과 고리대업을 한 사람들이었다. 공주 인근에서 수집된 미곡 등 농산물들은 대부분 공주에서 군산에 이르는 뱃길을 통해서 일본이나 한양 지역으로 이출되었다.
[철도와 공주]
공주 지역 사람들은 어느 지역 사람들보다도 철도에 대한 유감이 많다. 그 이유는 경부선과 호남선이 공주를 비켜 지나감으로써 여러 면에서 개발 기회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공주 지역 유생들이 철도 부설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철도가 공주를 우회하게 되었다고 하는 데, 이는 꾸며진 이야기일 뿐이다. 물론 조상 무덤에 손댈 수 없다고 하면서 철도 부설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공주 지역 유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반대는 공주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으며, 또 이것 때문에 철도 노선이 뒤바뀐 것도 아니었다.
1899년 경부선 노선을 어디로 설정할 것인가를 논의할 때, 한 때 전의~공주~논산~은진~금산~영동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고려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위의 코스는 최종 결정 단계에서 1904년 러일전쟁에 대비하는 경제적 및 군사적인 이유로 폐기되고 말았다. 호남선 노선도 마찬가지로 일본의 국가적 이익에 따라 결정된 것이었다.
1900년대 말부터 호남선을 부설할 때 일본은 천안~공주~논산으로 이어지는 직선 코스를 선택하지 않고 기존의 경부철도 노선을 그대로 활용하는 방침을 채택하였는 데, 이것도 유생들의 반대 때문이 아니라 비용과 시간을 절감하기 위해서였다. 철도 노선을 결정할 때 일본이 중요하게 고려한 사항은 철도가 지나는 지역의 인구 수, 논·밭의 넓이, 상업의 발달, 교통 발달 정도 등이었다.
공주 지역은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부설되어 조치원·대전·논산 지역의 성장이 가속화 되면서, 상업 중심지로서의 기능은 물론이고 행정 중심지로서의 기능도 점차 상실해가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변화는 충청남도 내무부가 작성한 1908년의 「충청남도도세일반(忠淸南道道勢一般)」을 보아도 그 추세가 확인된다.
1908년 현재 대전역과 가까운 산내면(역전 일대)의 경우는 상업호가 무려 1,476호(6,065명), 유등천면(유천동, 도마동 일대)은 780호(3,329명), 탄동면(탄방동 일대)은 859호(3,519명), 구즉면(원촌동, 문지동 일대)은 811호(3,315명)에 각각 달했는데, 위의 동리들은 조선시대에는 회덕군(현재의 대전 지역)에 포함된 한적한 시골 마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회덕군 산내면의 경우 1908년 현재 공주읍과 남부면을 합친 규모보다 더 많은 상업호와 인구를 포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조치원이 포함된 연기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연기군의 경우는 1908년 당시 전체 군의 상업호가 3,387호(20,133명)였는데, 그 가운데 조치원이 자리한 서면의 상업호는 662호(4,713명), 구읍 소재지인 남면의 상업호는 726호(4,789명)였다. 1908년 당시 공주읍과 남부면(현재의 웅진동 지역)의 상업호는 각각 575호(2,377명), 409호(1,285명)에 불과하였다.
1932년 10월 충남도청이 공주 지역에서 대전 지역으로 옮겨진 것도 결국은 철도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철도 때문에 공주는 지는 달이 되었고, 천안·조치원·대전 및 논산은 뜨는 해가 되었던 것이었다. 1904년 당시 대전 시가지, 즉 본정통(本町通)[현재의 원동]과 춘일정통(春日町通)[현재의 선화동] 등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겨우 188명에 불과했으나, 1910년에는 3,891명 그리고 1932년 도청이 대전으로 옮겨지는 시기에는 무려 8,254명(조선인 25,481명)에 달하였다. 하지만 공주의 일본인 숫자는 1915년 1,560명(조선인 4,624명)이었으나, 1932년에는 1,342명(9,448명)으로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공주의 상업]
개항 이전 시기까지 공주 지역은 충청권의 행정 중심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였다. 19세기 경제 사정을 보여주는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공주는 모시·담배·면화 등을 중심으로 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여, 일찍부터 외지인들이 공주 읍내 지역으로 몰려들어 매우 번성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공주 지역의 부녀자들은 사시사철 일이 끊이지 않아 밤을 도와 베를 짜느라 항상 잠자는 시간이 모자랄 정도이며, 또 품팔이 노동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품삯이 후하여 조금만 부지런하면 누구나 한밑천을 잡을 수 있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당시 공주 인근 지역에는 1일과 6일에 열리는 읍내장과 건평장, 2일과 7일에 열리는 경천장과 모로원장, 3일과 8일에 열리는 유구장과 대교장, 4일과 9일에 열리는 동천장과 왕진장, 5일과 10일에 열리는 광정장·이인장·유성장 등이 유명하였으며, 1900년대 초반까지 열린 공주약령시(藥令市)는 대구약령시와 비견될 정도로 물동량이 많았다고 한다.
공주 지역의 상업은 조선 말기에도 군산과 강경 등의 금강 수계 지역의 상업 발달에 힘입어 폭발적인 성장세를 지속할 수 있었다. 1895년 5월 인천영사관 보고에 의거해 보면, 당시 충청남도의 상업 중심지는 공주·강경·논산·예산·둔포 등지였는데, 이들 중심 시장은 주변의 정기 시장(5일장)들을 포섭하면서 각 시장의 물품을 집화·배급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공주장은 호남 지방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대로의 요충지에 해당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각 장시를 편력하지 않고, 한 곳에서 완전히 점(店)을 정하여 상업하는 자도 여럿 존재했다고 한다. 정확한 수치를 파악할 수는 없으나 일본인들의 조사에 따르면, 1900년을 전후한 시기 공주부 내에는 상점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이가 3백여 명, 그리고 객주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금강 수계를 이용한 상업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공주는 강경상권에 포섭된 측면도 있었다. 강경은 조선 후기 이래 전국 3대 시장 가운데 하나로 불릴 만큼 상업이 번성하였는데, 1908년 당시 인구는 3,493명(983호), 그 가운데 상업호는 27.6%인 271호 정도였다. 일제강점기 한창 경기가 좋을 때, 강경읍 지역에는 점포가 1,000여 개, 출시 인원은 평균 5천에서 7천여 명, 많을 때는 1만 5천에서 2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내륙으로의 상품 유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조선 말기까지 공주 지역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유통권을 가진 상업 중심지로서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전라도에서 생산된 면포, 마포, 한지 등이 공주를 매개로 한 내륙 유통로를 통해서 충남 서부 지역으로 판매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다. 구한말 공주에서 가장 저명했던 상인은 이기연(李基然), 박공우(朴公禹) 등이었는데, 일화(日貨)로 환산하면, 1만원 이상의 유동 자금을 가진 대상인들이었다. 당시 백미 중품의 석당(石當) 가격은 10원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