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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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錫龍 |
영어음역 | Jang Seokryong |
이칭/별칭 | 장용규(張龍逵),진백(震伯),유헌(遊軒),운전(雲田),문헌(文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인호 |
[정의]
조선 후기 구미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초명은 장용규(張龍逵), 자는 진백(震伯), 호는 유헌(遊軒)·운전(雲田).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이며 산음현감 장옥(張鈺)의 7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장호(張濠), 아버지는 사호옹(四好翁) 장학추(張學樞), 어머니는 김구운(金龜雲)의 딸로 선산김씨(善山金氏), 처는 허참(許傪)의 딸로 김해허씨(金海許氏)이다. 장학덕(張學㯖)에게 입양되었다.
[활동사항]
장석룡은 할아버지로부터 가학을 익혔으며 처가인 김해허씨의 학문도 수학하였다. 1846년(헌종 12) 정시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전적과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이듬해 사헌부지평과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848년 사간원정원을 거쳐 문과 시험관으로 활약하였다가 해남현감으로 나갔다. 1850년(철종 1)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853년 사헌부장령을 시작으로 내외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864년(고종 1)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를 진달하면서 인정(仁政)을 강조하고 언로를 열 것을 주장하였다. 그 뒤로 경주부윤, 이조참의, 공조판서 등을 지내고 1892년에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대사헌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 후 각 지방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고종의 밀유(密諭)를 받아 의병을 효유하였다. 1902년 궁내부특진관에 제수되었다.
[저술 및 작품]
1928년 양자 장승원(張承遠)에 의해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면 이우정(二憂亭)에서 문집 『유헌집(遊軒集)』11권 7책이 간행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묘소는 위봉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