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3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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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顯光 |
영어음역 | Jang Hyeongwang |
이칭/별칭 | 덕회(德晦),여헌(旅軒),문강(文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인호 |
[정의]
조선 시대 구미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개설]
장현광(張顯光)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이기설에서 일본설(一本說)에 입각하면서도, 이이의 ‘기발이승’을 수용하는 등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힘을 기울였으며, 산림의 한 사람으로서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하였다. 장현광의 강학 시설로 구미시 임수동에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가 있다.
[가계]
본관은 인동.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남산파의 분파조인 사천현감 장우(張俁)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장열(張烈)이며, 어머니는 경산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이팽석(李彭錫)의 딸이다.
[활동사항]
9세 때 자형인 노수함(盧守諴)으로부터 글을 익히고 14세 때인 1567년(명종 22)부터 학거(鶴渠) 장순(張峋)으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18세 때인 1571년(명종 4)에는 일생 동안 진행할 학문 계획서인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었다. 1576년(선조 9)에는 재주와 행실로 조정에 천거되었다.
1579년(선조 12)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질녀인 청주정씨와 결혼하였다. 1591년(선조 24)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모부인 이씨의 상중이었으므로 나아가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으로 피난하였다. 1594년 유성룡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과 제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95년(선조 28) 보은현감으로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일선(一善)으로 돌아왔다가 의금부에 잡혀갔다. 풀려난 후 난리를 피해 청송·봉화·일선·입암 등지를 돌아다녔다. 1601년(선조 34)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 거창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02년 공조좌랑으로 부임해 『주역(周易)』 교정에 참가하고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가 의성현령에 임명되어서는 부임하였다. 이후 1604년 순천군수, 1608년 합천군수, 1610년(광해군 2)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산림으로 있는 그에게 여러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 호소사(號召使)에 제수되자 의병을 모아 군사를 이끌고 가려는 즈음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병사를 해산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다음해 항복 소식을 듣고 영천 입암으로 갔다가 만욱재(晩勗齋)에서 죽었다.
[학문과 사상]
장현광의 학문은 지행병진(知行幷進)을 강조하는 데 특징이 있다. 학문의 길은 앎과 행함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실제로 각종 표제를 벽에 붙여놓거나 옆에 두고 보면서 실생활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55세 때 『역학도설(易學圖說)』을 편찬하기 시작하였으며, 68세 때 「경위설(經緯說)」, 75세 때 「만학요회(晩學要會)」, 78세 때 「우주설(宇宙說)」, 79세 때 「태극설(太極說)」을 저술하였다.
장현광은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한 도(道)에 의해 조화된다고 파악하였다. 또한 이(理)를 경(經)으로, 기(氣)를 위(緯)로 비유하여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체용(體用)적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성론에서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도 역시 별개의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17세기 조선 철학사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철학적 주장의 시원이 되었다.
[저술 및 작품]
『여헌선생문집』 13권, 『여헌선생속집』 10권, 『성리설(性理說)』 6권, 『역학도설(易學圖說)』 9권, 『용사일기(龍蛇日記)』 2권 등이 있다. 그 외 『여헌선생연보』 3권, 『급문제현록(及門諸賢錄)』 1권이 있어 참고가 된다. 『여헌선생문집』 권1에는 선산과 인동의 경치를 읊은 시가 많아 지역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권4와 권5의 서간에는 문인들에게 답한 편지가 있어 지역 유림의 동향을 파악하는 자료가 된다. 수록 내용은 대부분 예제에 대한 문답이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에 있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효종 8)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1655년 제자들에 의해 구미시 임수동 부지암에 세워졌던 서원이 1676년(숙종 2) 사액을 받아 동락서원이 되었다. 경내에는 신도비가 있다. 구미시 오태동에는 묘재(墓齋)로 사사당(四事堂)이 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입암서원(立巖書院)과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