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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436
한자 近現代
영어의미역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임삼조

[정의]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현대까지 경상북도 구미시의 역사.

[개설]

구미 지역은 1895년 지방제도의 개편 때 선산군·인동군으로 설립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선산군은 선산면과 고아면으로 분리되고, 인동군은 폐지되어 칠곡군에 병합되었다. 해방 후 1963년 선산군의 구미면이 구미읍으로 승격되었고, 1978년에는 구미읍과 인동면이 통합하여 구미시로 승격하면서 선산면에서 분리되었다. 1979년에는 선산면이 선산읍으로 승격되었다. 선산군은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미시와 통합되어 새로운 오늘날의 구미시가 되었다. 구미 지역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내륙 공업단지인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있다.

[변천]

1. 근대

1895년 지방제도 개편 때 소지역주의가 채택되어 23부제가 실시되자 선산도호부에서 선산군·인동군이 설립되었으며, 선산군은 대구부에 속하였다. 1896년에는 13도제 실시에 따라 3등군으로서 경상북도 선산군이 되었다. 1914년 3월 1일 인동군은 폐지되고, 인동군 관할의 9개 면인 읍내면·북면·동면·장곡면·문량면·석적면·북삼면·약목면·기산면이 칠곡군에 병합되었다. 한 달 뒤인 1914년 4월 1일 읍내면과 북면을 병합하여 인동면이라 개칭하고, 동년 7월 15일 인동면 중동 일부가 선산군 산동면 성수동에 편입되었다.

선산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내면의 교촌리·역촌리·조남리 등 6개 리, 독동면의 신기리·독동리·원당리 등 5개 리, 무래면의 내동리·고압리 등 5개 리 고남면 일부, 개령군 고성면 일부를 병합해 선산면이 되었다. 고아면은 본래 선산군 지역으로 망장면(網障面)이라 하여 예곡리·강정리·관심리·신화리·오로리 등 23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평성면의 항곡리·모하리·봉계리·송림리·다식리 등 18개 리와 내서면의 봉산리를 병합해 옛 고아부곡(高牙部曲)의 이름을 따서 고아면이 되었다.

이 시기에 창선학교, 선진학교 등이 설립되어 인재양성에 노력하였고, 의병장 허위가 항일의병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시 4월 3일 해평면에서, 4월 12일 선산면에서 각각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2. 현대

1950년 6·25전쟁 시 구미지역은 북한군의 대구공격을 위한 주된 통로였다. 1963년 구미면이 구미읍으로 승격된 후 인접 군과 행정 관할 구역의 조정이 있었다. 1973년 7월 1일 칠곡군 북삼면 낙계동이 구미읍에 편입되고 산동면 도산동이 군위군 소보면에 편입되었다. 인동은 1977년 3월 2일 경상북도 구미지역출장소의 행정 관할로 되었다. 1978년에는 2월 15일 법률 제301호(1977년 12월 19일 공포)에 의거, 구미읍과 인동면이 통합하여 구미시로 승격하면서 선산면에서 분리되었다.

1979년에는 선산면이 선산읍으로 승격되었다. 1988년 당시 선산군의 면적은 484.39㎢, 인구는 6만 6317명이었으며, 1개 면 97개 리가 있었으며, 군청 소재지는 선산읍 동부리였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1994년 8월 3일 공포)에 의거, 선산군이 구미시에 통합되어 오늘날의 구미시가 되었다. 지금은 선산읍이라는 행정 지명이 있다. 1997년 11월 1일에는 고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산업]

구미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공업 도시로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있다. 구미시와 칠곡군 석적면 등에 걸쳐 있는 구미국가산업단지는 한국의 실리콘밸리, 한국 전자공업의 메카 등으로 불리며, 전자공업·섬유공업을 중심으로 기술집약화·전문화·계열화를 통한 신제품 개발 및 수출 진흥을 목적으로 조성된 우리나라 내륙 최대의 공업단지이다. 1968년 8월 구미 지역을 지방공업개발 장려지구로 지정함에 따라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쪽에 섬유단지로 출발한 일반단지와 전자공업의 요지인 전자단지로 형성된 구미1공단이 있고, 동쪽에는 반도체 및 컴퓨터단지인 구미2공단(일명 인동공업단지), 전자 관련 부품 공장이 들어선 구미3공단 등이 있는 국내 최대의 내륙공업단지이다. 구미국가산업단지의 영향으로 선산읍고아읍 일대에 섬유·전자 부품 하청 공장이 들어서고 있으며, 그 외 고아읍에 잠사 공장, 해평면에 도정 공장이 있다.

[농업]

급격한 도시화와 교통망의 발달로 도심지 주변에는 원예 농업이 성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재배 외에도 땅콩·고등소채·수박·인삼·사과·양송이 등의 상품 작물 재배가 활발하다. 배·복숭아·포도·감·고추·마늘·오이·시금치·옥수수 등은 감소 추세인 반면, 수박·참외·사과·호박·당근·가지·양파·배추·메밀·조·수수 등은 증가 추세이다. 축산은 한우·돼지·닭·산양·사슴 등이 사육되고 있다.

산림은 악산(惡山)이라 불릴 정도로 벌거숭이 산이었으나, 이제는 어느 산에서도 토피(土皮)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푸르다. 그러나 임상(林相)은 임목 수급과는 거리가 먼 궁핍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2009년 12월 31일 현재 임목 축적은 3,467,462㎥로, 침엽수 1,074,813㎥, 활엽수 439,831㎥, 혼효림 1,952,818㎥이다. 임산물 생산량은 연료 22M/T, 농용자재 2,690t, 종실 585,953㎏, 버섯 376,000㎏, 약용 280㎏, 산나물 5,564㎏이다. 광구 수는 7개로 가행 광구는 없으며 광산물은 해평에서 주로 고령토·석탄이 산출된다. 광산으로는 옥성면의 금·은 광산, 도개면의 규석 광산, 고아읍의 고령토 광산, 옥성면의 금 광산이 있었다.

[교육기관]

근대에 신교육 보급이 이루어지자 구미 지역 유지들은 창선(彰善)·선진(善進) 등의 학교를 건립해 인재 양성에 노력했다. 근대에 설립된 공립 초등 교육기관으로는 1908년에 설립된 선산공립보통학교(지금의 선산초등학교의 전신)가 있으며, 1912년 인동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된 뒤 17개의 학교가 세워졌으며, 중등학교는 광복 이후에 설립되었다. 구미시의 교육은 정부 수립 이후 교육기관 팽창 정책, 구미국가산업단지 설치로 인한 인구 증가가 맞물리면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거듭하였다. 2010년 4월 1일 현재 유치원 81개교, 초등학교 49개교, 중학교 27개교, 고등학교 21개교, 대학 4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설립되어 있다.

[교통체계]

근대에는 경부선 철도가 교통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1970년 경부고속국도가 개통되고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교통이 좋아졌다. 구미국가산업단지 외곽에 강변도로, 구미대교 등이 건설되어 인접 지역인 안동·의성·군위·칠곡 등지와 교통 소통이 원활하게 되었다. 특히 구미대교의 개통은 구미국가산업단지의 발전뿐 아니라 금오산도립공원의 관광 개발에 크게 기여하여 다리 부근의 동락서원·부지암·천연대(天淵臺)·여차정·능파대·장암(壯巖) 등이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현재는 남구미인터체인지와 구미인터체인지를 통하여 경부고속국도, 구마고속국도, 중앙고속국도 등이 연결되고, 국도 33호선과 지방도 907호선, 지방도 904호선과 경부선 철도가 지나며, 구미국가산업단지에서 50㎞ 거리에 대구공항이 있다. 이러한 교통 체계는 구미국가산업단지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역사적 사건]

근현대에 일어난 구미 지역의 대표적 사건으로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선산민란(善山民亂)이다. 선산민란은 1862년(철종 13) 4월 2일 경상도 선산도호부에서 결전(結錢: 토지의 전결 단위에 따라 부과하는 세금)의 징수 문제로 일어난 민란이다. 둘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임은동 독립만세운동이다. 한말 의병장 허위의 출신지인 임은동에서 임은허씨 일문 즉 허겸·허학·허로·허형·허발·허담 등이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 때 임은동의 애국지사 강용준·유시동이 1919년 4월 8일 오후 10시 300여 명과 더불어 독립 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한 후 해산하였으나 전부 검거되었다.

셋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진평동 독립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이 독립선언서 20매를 들고 동지 이내성진평동 유지 이상백을 찾아가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3월 12일 이영식·이범성·이내성 등이 제1차 만세 시위를 벌였고, 대구 계성학교 학생인 김도길진평동으로 와서 청년 유지 박봉술·김성윤 등과 함께 3월 14일 재차 만세 시위를 벌였다. 넷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6·25전쟁 때의 비산진 전투이다. 1950년 8월 15일 국군 제15연대(8월 4일 인동국민학교에 집결)가 홀소(속칭 지푼다리), 북삼의 마진나루터 등을 통해 낙동강을 도하하려던 북한군을 비산진에서 막아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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