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21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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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
영어의미역 | Roman Catholic Church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대환 |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활동하는 로마가톨릭교회.
[개설]
천주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라고도 한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은 특정한 개인·인종·시대를 초월한 전체 인류를 위한 것이라는 뜻에서 이 명칭을 사용한다.
[변천]
1800~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신자들이 전국 산골로 숨어들었는데, 이들이 모여서 살게 된 촌락이 이른바 ‘신자촌’이다. 이런 신자촌이 영남에만 7곳이 있었다고 한다. 1815년에 있었던 을해박해(乙亥迫害) 이후로 영남의 신자촌은 청송, 진보, 상주 등 48개에 이르렀다. 문경새재와 화령을 거쳐 남하한 신자들이 또 신자촌을 이루어, 1827년에는 대구를 포함하여 모두 68개의 신자촌이 영남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때 상주에서 대구 사이의 길목에 터를 잡은 곳이 여진(余津)이다. 이곳이 낙동강 옆의 옛 선산군 해평면 낙산동이다. 여진공소는 1866년 병인년(丙寅年)에 이르러 신자가 96명까지 늘어났다.
김명양(金明陽, 실학자로 낙향한 일선인)은 당시 금릉군 남면 부황동 등골로 이주하여 남만억에게 신앙을 전하였고, 남만억은 1894년경 다시 고아면 송림동 권치하에게 교리를 전하여 영세시켰다. 여진에서 떠나간 신자들의 신앙의 불씨가 송림의 공소를 이룬 것이다. 1906년에는 선산군 고아면 송림동 102번지의 목조 기와집을 구입하여 공소로 사용했고, 1933년에는 송림동 210번지에 새로 공소를 마련하는 등 세 차례나 옮기다가 1967년 송림동 476번지에 현대식 건물을 지었다.
송림공소를 세운 권치하의 셋째 아들 권성중은 1930년 구미로 이주해 살게 되었고, 1935년경에는 이례동에 살던 권익중(권성중의 중형)이 구미로 이주해 옴으로써 형제가 권익중의 집에서 참례를 보았다. 1920년경 송림에서 영세한 박유리안나의 아들 이재원이 1940년경에 이사를 오고 또 같은 때 권익중의 질녀 권우시아(김종봉의 모)가 왜관에서 이사를 옴으로써 네 집이 되었다. 이렇게 차츰 신자가 늘어나 1948년에는 구미공소로 승격되었고, 1956년 12월 30일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1979년 9월 26일 치명복자 축일에 구미본당이라 통칭하던 구 본당을 원평본당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인동본당은 1905년 금전동 가곡에 거주하는 방씨와 공씨들이 신앙을 받아들여 가실공소로 발족하였다. 1947년에는 교통 문제로 구미시 금전동에서 지금의 황상동으로 공소를 옮겨 왜관본당 관할이 되었고, 1956년 현 위치에 공소 건물을 지어 인동공소로 되었다가 1979년 1월 1일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신부는 허창수(헤르베르트, 독일인) 신부였다. 1991년 4월 21일 김충(프란치스코) 신부가 구미시 인의동 351-1번지로 본당 이전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현재는 서정섭(바르톨로메오) 신부가 주임신부다.
구미가 공업도시로 발전함에 따라 신자가 늘어나게 되었고, 1978년에 신평동 54번지[야은로45길 13]에 대지 3,762㎡를 매입하여 건평 405.9㎡의 새 성당을 건축하여 1979년 9월 치명복자 축일에 구미본당을 분리, 신평본당을 세웠다. 형곡본당은 1990년 2월 11일 형곡동 133번지에 새 성당을 착공하여 1990년 12월 18일 준공, 1990년 12월 23일 원평본당에서 분리되어 그 축성을 보게 되었다.
[현황]
2011년 현재 구미시에 있는 천주교회는 선산성당·해평성당·도량성당·원평성당·형곡성당·신평성당·인동성당·고아성당 등이며, 8개의 공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