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005 |
---|---|
한자 | -過去-未來 |
분야 | 지리/인문 지리,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산북동 2764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원봉연 |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 산북동 열대자 마을의 생성 유래와 변화 및 현재 모습
[개설]
열대자 마을의 유래는 1920년에서 1923년까지 일본의 불이흥업 주식 회사가 오늘날의 군산시 미성읍과 옥서면 일대 간석지를 간척하여 만든 간척 농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회사가 간척한 토지 24,793,388㎡ 중 북쪽의 9,917,355㎡에 일본 농민을 이주 정착케 한 마을을 불이농촌이라 하였다. 이곳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17개현에서 325호 1,700여 명이 이주하여 살았는데, 이들 일본의 이주민들은 불이농촌에 와서 자신들의 출신지 이름을 따서 히로시마촌 야마가타촌, 사가촌 등으로 촌락 이름을 불렀다. 1945년 광복이 되고 일본인들이 떠난 불이농촌 지역은 해일, 해이, 해사, 해칠, 열대자 등의 마을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불이흥업 주식 회사는 간척지 중앙에 3,193,388㎡의 큰 저수지를 만들었고, 도로는 불이농촌 중앙과 주위에 큰 도로를 만들고 또 종횡으로 크고 작은 길을 만들어 기계화 영농과 농산물과 비료 운반에 편리하도록 설계하였다.
열대자 마을의 명칭은 광복 이후 불리어져 왔는데, 그 유래는 당시 이 마을에서 촌락과 촌락을 연결하는 농로의 폭이 15자 즉 열댓 자(尺)가 된다고 하여 열대자라 불렀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한 자[尺]는 30㎝로 15자[尺]라면 폭이 4.5m정도가 되는 널찍한 도로였던 것이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현재의 열대자 마을은 옥성·신창·금성·평화 마을 등 4개로 구성되어 있다.
[군산 지역의 간척 사업]
문헌상으로 보면 우리나라 간척의 기원은 고려 시대이다. 고려 조정은 몽고군의 침입을 피하여 강화로 천도[1232]한 뒤, 1235년(고종 22)에 해상 방어 목적으로 연안 제방을 구축한 것이 간척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 뒤 1248년(고종 35)때 농지 조성을 위한 간척 사업이 이루어 졌다. 이후 조선 시대에도 계속 시행되어 왔다.
군산·옥구 지역에서도 구전에 따르면 1890년대 당시 선혜청 당상관이었던 민영익과 농상공부 대신인 이완용에 의하여 옥구군 어은리에서 전주에 이르는 만경강 하구 좌측[북쪽] 갯벌 지역에 대한 간척이 있었다고 한다.
군산은 개항[1899] 초기 도시 형성 과정에서 주변 일대에 간석지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는 지형적 특성으로 간석지의 매립과 간척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군산 지역 간척 사업의 기본 목적은 곡물을 생산하는 농지 확대, 일본인의 이민 사업 수행, 곡물을 수송하기 위한 항만 건설 등이었다.
군산 지역의 최대 간척 사업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부터 1923년에 걸쳐 불이흥업 주식 회사(不二興業株式會社)[이하 불이흥업]에 의해 현재의 군산시 미성동과 옥서면 일대에서 실시된 약 24,793,388㎡의 불이 간척지 조성 사업이다. 또한 1938년에는 일본인 지주 행천(行川)에 의해 옥구군 회현면 월연리에서 옥구군 수산리 일대에 약 2,700,000㎡ 규모의 간척이 이루어져 염전과 경작지로 이용되었다.
한편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이루어진 초기의 군산 도시 형성 과정에서 매립으로 조성된 면적은 약 122,314㎡에 이른다. 시기적으로 보면 시가지 조성을 위한 간척은 1930년대에 집중되어서 군산의 도시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광복이후 1950년대에는 토지 개량 조합에 의해서 회현 간척지가 개발되어 1,785,123㎡의 농지가 조성되었다. 1965년부터 1976년까지 농업 진흥 공사가 세계 식량 프로그램[WFP]의 지원으로 당시 옥구군 미면 일대에 미면 간척지 간척 사업으로 약 5,950,413㎡의 농지를 조성했다. 미면 간척지는 불이흥업에서 조성한 간척지와 가내도, 내초도, 옥녀봉을 연결 하였으며, 방조제의 연장이 4.3㎞에 달하였다. 1968년부터 1972년 까지는 한국 합판에서 옥구읍 어은리 앞에 방조제를 쌓아 약 5,980,165㎡의 염전을 조성했다.
1970년대 중반이후 농업의 쇠퇴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농지 조성을 위한 간척 사업은 거의 중단되었고, 반면에 공업 분야의 성장으로 공업용지 조성을 위한 간척 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즉 1978년부터 불이 간척지 전면에서 서북쪽 바다 쪽으로 간척사업이 진행되어 군산 지방 산업 단지 5,917,355㎡를 조성했다. 또한 1988년부터는 기존의 군산 지방 산업 단지 부지와 오식도를 연결 매립 작업을 추진하여 제 1 군산 국가 산업 단지 부지 6,909,090㎡을 조성하였으며, 여기에는 현재 한국 GM 등 기계, 금속 업종이 입주하여 가동 중이다.
그리고 1992년부터 2006년까지 간척 사업으로 467만 평의 군산 2 국가 산업 단지가 조성되면서 현재 현대 중공업 군산 조선소 등의 기업이 입주하고 있다.
현재 군산 지역의 간척 사업은 1991년부터 2010년까지 새만금 방조제가 완공됨으로써 2010년부터 2030년까지 새만금 지구 내부 개발 사업이 농업 용지, 산업 용지 등 8대 용지로 나누어 진행될 계획이다.
[불이흥업 주식 회사와 일본인 이주]
군산 지역에서 새만금 사업 이전에 이루어진 최대 간척 사업을 말한다면 역시 불이 간척지를 들 수 있다. 불이 간척지는 일명 조선의 수리왕이라고 불리는 후지이 겐타로[藤井寬太郞]의 불이흥업에 의해서 만들어진 간척지이다. 이 회사는 1904년에 한국에 들어와 1919년 옥구군에 농장을 설립하고, 1920년 임옥 수리 조합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간척 사업을 하였다.
방조제는 옥구군 해변[현 전북 외국어 고등학교]에서 현재의 옥서면 옥봉리[과거의 무의인도(無衣人島)]까지 6㎞와 하제[과거의 알산도(卵山導)]~옥구읍 어은리까지 8㎞ 등 총 14㎞ 구간을 쌓았다. 이 지역은 서해안의 특징 때문에 썰물 때는 끊임없는 갯벌이 벌판처럼 펼쳐져 방조제만 쌓으면 농토로 바꿀 수 있는 간척의 최적지였다.
불이흥업은 바로 이 땅에 1920년부터 3년에 걸쳐 간척 사업을 하였다. 총 간척 면적 24,793,388㎡ 중에 북쪽 9,917,355㎡는 일본인 이주 정착촌인 불이농촌, 중앙에 3,193,388㎡는 인공 저수지, 남쪽의 8,429,752㎡는 한국인 소작지인 불이 옥구 농장, 그리고 나머지 약 4,958,677㎡에는 수로와 도로를 만들었다.
당시 간척 사업은 주로 인력에 의존한 작업으로 일꾼 한 사람 한 사람이 흙을 파서 나르는 일의 연속이었다. 이를 위하여 많은 사람이 동원 되었는데 이때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고향에서 일본인에게 땅을 빼앗긴 조선인 농민과 소작인이 대부분 이었다
이들 유랑 농민들은 간척 사업이 끝난 후 간척 농지에 대한 영구 소작권 보장과 소작료 3년 면제 그리고 간척 공사 임금 지급이라는 모집 광고에 현혹되어 충청남도와 호남 지역에서 모여든 숫자가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간척사업 후 이들은 남쪽의 농장[불이 옥구 농장]에서 6개 촌락으로 나뉘어 300여 호가 소작농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불이농촌과 일본인 이주]
불이흥업은 간척촌을 조성하면서 신일본 이상촌(新日本理想村) 건설을 목표로 내세웠다.
불이농촌의 이민 사업은 간척 사업 도중이던 1924년 2월부터 시작되었다. 불이흥업은 1923년 1월 1일 현재 991㎡당 지가 100엔을 기초로 토지 대금 100만 엔과 거주 건설비나 제염비 등 합계 140만 엔이 소요되는 사업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일본 대장성에 거치기간 연장과 180만 엔을 차입했다.
불이흥업은 상환 불능으로 대장성에 자작농 창설 자금의 추가 융자를 요청하였다. 또한 자금 확보를 위해 1928년 3월 31일 불이흥업은 불이 산업 조합[자작농 창설 조합]의 설립 허가를 받아 조직하였다. 이에 따라 불이농촌 건설은 불이흥업에 의한 사업이 아니라, 조합원인 이주민에 의한 사업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불이농촌의 실질적인 주체는 여전히 산업 조합의 운영에 관여한 불이흥업이었다. 그리하여 사업의 결과 1934년에 불이농촌에는 총 325호가 이주하였다.
불이농촌은 입주 당시부터 출신 지역별로 10호 단위로 하여 촌락을 형성하였다. 촌 이름은 이주자들의 출신지 이름을 붙였다. 예를 들어 도쿠시마 무라[德島村], 나라 무라[奈良村], 야마가타 무라[山形村] 등등이다. 1940년대에는 총 32개 촌이 있었는데, 미면 산북리에서 일본 야마가다현[山形縣] 출신 농민[40호, 인구 134명]촌이 간척지에서 가장 큰 같은 현 출신으로 구성된 지연 공동체 촌락이었다.
이때의 일본인 이주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다. 일본은 당시 식량 문제와 빈민 구제 등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주 정책을 적극적으로 폈다. 불이흥업도 직접 모집의 형식을 갖추어 이민자를 끌어들였지만, 내무성을 거쳐 일본 안의 각 부와 현에 의뢰하는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실상은 일본의 이민 정책이 적극적인 힘이 되었다.
각 촌에는 중심 인물로 애국 반장을 겸한 구장을 두었다. 이들 구장은 불이농촌 산업 조합의 평의원이었으며, 불이농촌의 행정을 관할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맡았다. 또한 불이농촌에는 재향 군인 분회, 의료 공제회, 대일본 부인회 등 각종 일본 단체 분회를 두었다.
일본으로부터 이주시킨 영농자는 반드시 스스로 노동을 할 수 있는 체력 조건이 구비된 자로서 차남이나 3남을 주로 하였다. 1호당 할당되는 토지는 개답지 약 29,752㎡이며, 노동력이 많은 가족에게는 분배지를 증가시켜 주었다. 또한 정착 생활을 위한 택지와 채전 밭으로 991㎡를 일정하게 구획하여 그 택지 위에 일정한 건평·규모·형태·간격·재료를 가지고 남향으로 일자 직가형(一字直家形)의 일식 와가를 신축하여 할당하였다. 그리고 20년 연부 상환을 하면 땅을 소유할 수 있는 자작농의 혜택이 주어졌다.
10호 내외로 집단화된 촌락에는 우물과 목욕탕 및 공중 집합소를 구비하고 손님을 접대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었다. 어느 가옥이나 방 2, 부엌 1, 창고 1, 마루 1, 변소 1을 가진 구조로 흰 회벽을 바른 일식 와가를 신축하여 1920년대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문화 농촌을 조성하였다. 또 매년 토지의 비옥도가 더해져 가기 때문에 수익이 더 높아져 갈 뿐만 아니라, 이주한 일본인들에게는 교통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철도는 50%, 기선은 30%의 할인 특전을 주고 있었다.
한편 이주자들은 불이농촌 앞쪽에 역시 간척 사업으로 군산에 편입되었던 입이도(入耳島)에 신사를 짓고 1년에 두 차례 참배를 지냈다.
[광복과 불이농촌]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광복이 되고, 9월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는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다. 미군정 당국은 1946년 2월21일 군정 법령 제152호에 의해 신한 공사를 설립하였다. 신한 공사는 과거 동양 척식 회사를 비롯한 토지 회사가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는 물론 일본인 지주의 소유 농지 전체를 관리하는 미군정 직속하의 특수 기관이었다.
그리고 1948년 3월 22일 미군정에서 중앙 토지 행정처 설치령을 발표하고 신한 공사 소관의 귀속 농지 매각 처분[일본인 소유]을 하였다.
불이농촌의 경우도 신한 공사가 관리 업무를 대행하여 전재민이나 이재민을 대상으로 재분배되거나, 일제 강점기에 여기에 연고권을 가진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여 재분배하였는데 한정된 토지에 대해 많은 토지 분배 희망자가 있어 토지는 더욱 세분화되어 분배되었다. 후에 이는 촌락 구조와 가옥 구조 및 토지 구획에까지 영향을 미쳐 경관 변화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불이농촌의 일본인들은 광복 직후 신변 보호를 위하여 군산 초등학교에 집단 거주 하였는데 가을 수확에 미련이 있어 불이농촌에서 벼를 베려고 하였으나, 한국인이 두려워 가지를 못하였다. 그러다가 군산에 진주한 미군의 경호 아래 수확을 하였는데, 일본으로 철수가 시작되어 벼를 가져가지는 못했다고 하니 땅과 쌀에 대한 일본인들의 집념을 엿볼 수 있다.
1945년 광복 후 촌락에는 한국인의 생활에 필요한 특수 시설이나 부대 시설이 증축되었다. 가옥의 골격은 그대로 두고 두 집 살림을 할 수 있도록 내부구조에 변경을 가져왔다든가, 변소 시설을 마당 한켠으로 설치하거나 농기구 창고, 곡간 등을 증축하고, 이발소, 정미소, 미곡 창고, 점포도 첨가되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인 이주자들이 조성했던 촌락은 대부분 개조되어 일자식 가옥의 옛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촌락 단위의 구조는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다녔던 불이 심상 소학교는 1945년 문창 초등학교가 되었고[열대자 마을에는 1970년에 해성 분교장이, 1973년에 해성 초등학교로 독립 분가 했다.], 불이 농장 사무소가 있었던 자리에는 해성 교회가 들어서 있다.
일제 강점기 개설된 군산~불이선 도로는 2002년에 전북 외국어 고등학교에서 군산 비행장까지 4차선으로 확장 및 포장되었다. 예전에 히로시마촌 미나미사촌 이라 불리웠던 마을 뒤쪽으로는 1978년부터 조성된 군산 지방 공업 단지와 군산 외항이 들어서 있다.
한편 문창 초등학교 앞 길 건너에는 1969년부터 아메리카 타운이 조성되었다.
[열대자 마을의 현재 모습]
1945년 광복 후 일본인들이 떠나자 불이농촌의 다른 마을과 같이 열대자 마을에는 옥구읍 등 주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1950년 6·25 전쟁 후에는 실향민도 일부 정착하였다.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일본인이 살던 가옥과 대지 991㎡를 2가구가 2개로 분할하여 살았고,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없고 권리권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부터 주민들은 비로소 토지와 가옥에 대한 등기를 하였다.
1950~60년대의 마을 모습은 별 차이가 없었으나, 1970년에 시작한 새마을운동으로 변화가 있었다. 마을 길을 넓히고, 슬레이트로 지붕 개량, 논을 매립하고 농수로를 복개하는 등 마을의 규모가 커졌다.
1970~80년대의 열대자 마을의 주민 구성은 대·소농이 혼재하였으며, 논 4,958㎡에서 벼 40~50가마[60㎏]를 생산하였다. 현재는 1가구당 논 평균9,917㎡ 정도를 소유·경작하고 있으며, 약 4,958㎡에서 벼 약 80가마[40㎏]를 생산하고 있다.
현재의 열대자 마을은 군산시 산북동 옥성 마을[예전의 히로시마촌, 오카야마촌 2564번지 등], 신창 마을[예전의 사가촌 2568번지 등], 금성 마을[예전의 도쿠시마촌], 평화 마을[예전의 야마가타촌 2764번지 등] 등 4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법정동리는 1945년 광복 후 옥구군 미면 산북리였는데, 1989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557호에 의거 군산시 산북동으로 행정 구역 변경이 이루어졌다. 열대자 마을의 행정동은 군산시 미성동이며, 동사무소는 군산시 산북동 미성 문화 마을길 61에 소재하고 있다.
2013년 5월 31일 현재 열대자 마을의 인구 현황을 보면 옥성 마을은 110가구에 인구수는 220명이다. 신창 마을은 98가구에 인구수 203명이다. 금성 마을 및 평화 마을은 107가구에 인구수는 230명이다.
열대자 마을 주민들은 다른 농촌 마을과 같이 주업인 농업과 농한기에 부업을 하여 농외 소득을 올리고 있다. 과거에 이곳에는 질병이나 유행병이 없었던 농촌 마을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근에 공업 단지가 들어서서 정주여건과 환경은 변화가 있다. 열대자 마을 주민들은 여러 면에서 과거보다 생활여건이 향상된 마을의 발전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