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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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後期最大-水軍基地-古群山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종수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에 설치한 고군산진의 역사
[고군산진 설립 이전의 군산도]
고군산 군도(古群山群島)는 군산 남쪽 약 50㎞ 해상에 위치한 여러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행정 구역상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에 속하는 고군산 군도는 선유도(仙遊島), 무녀도(巫女島), 장자도(壮子島), 야미도(夜味島), 신시도(新侍島), 관리도(串里島), 대장도(大長島), 횡경도(横境島), 방축도(防築島), 명도(明島), 말도(末島) 등 10여 개의 유인도(有人島)와 20여 개의 무인도(無人島)로 이루어진 무리 섬이다. 오늘날 흔히 선유도로도 통칭되는 고군산 군도는 고려와 조선 전기에는 군산도(群山島)라고 불렸다.
이곳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선유도 진말 등지에서 조개무지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러한 군산도가 역사상 처음으로 주목받게 되는 것은 660년 당나라의 백제 침공 때였다. 백제를 침공하고자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13만 대군은 660년 중국 산동성 성산에서 출발하여 6월 21일 서해 상의 덕물도[오늘날의 덕적도]에 도착하였다. 이때 덕물도에 가서 당나라군을 맞이하였던 신라 태자 김법민은 소정방과 더불어 7월 10일 사비성 남쪽에서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합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소정방이 거느린 당나라군은 덕물도를 출발하여 서해안으로 내려가 7월 9일 기벌포[오늘날의 군산]에서 상륙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약 10여 일이 소요되었는데, 이 기간에 당나라군은 물을 구하고 상륙 준비를 하기 위해 어딘가에 정박하였을 것이고, 그 정박지는 금강 하구의 군산도일 가능성이 크다. 이와 같이 군산도에서 10여 일을 보낸 당나라군은 660년 7월 9일 오늘날의 군산 방면으로 상륙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660년 백강 전투이며, 오늘날 군산에서는 이 전투와 관련하여 오성산 전설과 천방사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660년 백제 멸망 이후 통일 신라 시대를 거쳐 918년 고려가 건국되자, 송(宋), 일본(日本), 유구(琉球)를 비롯하여 멀리 대식국(大食国)[아라비아] 상인까지 고려에 왕래하였다. 고려의 수도 개경은 세계인이 왕래하는 국제 도시가 되었고, 개경의 문호인 벽란도는 국제 무역항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들 상인들을 통하여 ‘코리아(Korea)’란 이름이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고려의 대외 무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송과의 무역이었다. 고려와 송과의 무역 항로는 산둥 반도에서 황해도 연안을 거쳐 예성강 구에 이르는 직선 기선이 이용되었으나 뒤에는 거란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피하여 명주→흑산도→군산도→벽란도에 이르는 남해안 우회 항로가 많이 이용되었다. 이로써 군산도는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 중요한 기항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1123년(인종 원년)에 송나라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은 『선화 봉사 고려 도경(宣和奉使高麗図経)』에서 군산도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군산도에서 군사들로 무장한 6척의 배를 보내 송나라 사신을 호위하게 하고, 섬에서는 1백 명의 군사들이 깃발을 들고 도열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군산도에는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객관으로 쓰인 군산정(群山亭)이란 건물이 있었는데, 그 뒤에 두 봉우리[망주봉으로 생각됨]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곳에는 관청 건물 10여 칸이 있었고, 서쪽으로 오룡묘(五竜廟), 자복사(資福寺), 숭산 행궁(崧山行宮) 등도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고려 시대에 군산도는 서해안의 중요한 군사 기지 역할을 하였다. 무장한 군사를 실은 배가 송나라 사신의 배를 호위하고, 또 섬 안에는 1백여 명의 군사들이 도열하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군산도에는 다수의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12세기에 송과의 교류가 왕성할 때 군산도는 국제 교역의 거점 항구로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3세기에 들어와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게 되면서 군산도는 피난민의 집결지와 대몽 항쟁 세력의 근거지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1270년 고려 정부가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1270년(원종 11) 6월 1일 삼별초(三別抄)는 난을 일으켜 강화도를 점령하고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温)을 추대하여 고려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3일 후인 6월 3일에 1,000여 척의 배를 동원하여 공사(公私)의 재화와 사람들을 모두 싣고 강화도 구포(鳩浦)를 출발하여 남쪽으로 향했다. 최종 목적지 진도에 도착한 것은 강화도를 떠난 지 70여 일 만인 8월 19일이었다. 강화에서 진도까지 항해하는 데 70여 일이라는 긴 시일이 소요된 내막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강화도에서 진도로 항해하는 길목에 군산도가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삼별초가 군산도에 정박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오늘날까지 군산도에 왕릉이 있었다는 기록이 다수 전해 내려오고 있다. 『신증 동국 여지 승람(新増東国輿地勝覧)』 만경현(万頃県)조에는 “섬 안에는 큰 무덤이 있는데 마치 군왕(君王)의 능과 같다. 근세에 이웃 고을 수령이 그 무덤을 파헤쳐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을 많이 얻었는데, 사람들에게 고발당하자 도망갔다.”라 하여 군산도에 왕릉과 같은 큰 무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17세기 후반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여 비고(東輿備考)』에서도 군산도 안에 큰 무덤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왕릉이라고 쓰여 있다. 이 왕릉은 삼별초군에 가담한 왕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금제, 은제 그릇을 부장한다는 것은 왕족이 아니면 힘들기 때문이다. 삼별초 군이 강화를 떠나 진도까지 항해하는 데 무려 70여 일이나 걸린 것은 이 왕릉 조성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하는 추측도 들지만 사료가 없어 더 이상의 추정은 불가능하다.
14세기에 들어와 군산도는 왜구의 극심한 침략에 시달리게 된다. 왜구는 13세기 초부터 우리나라에 침입하여 약탈행위를 자행하였는데, 14세기에 들어와 이들의 침입은 더욱 빈번해지고, 그 규모도 점차 커졌다. 1323년(충숙왕 10) 6월 왜구는 군산도에 침입하여 개경으로 가는 조운선을 습격하여 조세미를 약탈해갔으며, 다음날에는 추자도에 침입하여 주민을 납치해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왜구는 14세기 후반에 들어와 더욱 대규모화했고, 또 정규 병력화했다. 특히 1380년(우왕 6) 8월 왜구들은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거느리고 임피의 진성창(鎮城倉)을 노략질하기 위해 진포로 침입해 왔는데, 왜구의 수는 무려 10,000명 이상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왜구의 대 함대를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 부원수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 함대가 함포 사격을 통해 궤멸시키니, 이것이 그 유명한 진포 대첩이다.
진포 대첩으로 왜구는 격퇴 당하였으나 이들이 진포에 들어올 때 그 길목에 있던 군산도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구들은 지나가는 곳마다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여 그들이 한번 지나가면 시체가 산과 들판을 덮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따라서 진포 대첩으로 격퇴당하기 직전에 500척에 달하는 왜구의 대선단이 거쳐 간 군산도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 전기의 수군 시설과 군산정, 오룡묘, 자복사, 숭산 행궁 등뿐만 아니라 민가들도 모두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고군산진의 설치]
고려 말 진포 대첩 이후 조선 전기 동안 군산도에는 아무런 국가 시설도 없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군산 지역의 군사적, 경제적 중요성은 계속 부각되어갔다. 이 당시 군사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서해 상에서 등장하는 황당선(荒唐船)과 해적을 방비하는 일이었다. 중국 어선·상선으로서 불법적으로 서해에 침범하는 배를 황당선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16세기 중반부터 서해에 출몰하여 민간인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이들은 물고기를 마구 잡아가고, 비밀 무역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소득이 적거나 식량이 떨어지면 해안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하고, 우리나라의 배를 습격하는 해적 떼로 변하기도 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9월 9일에 군산도 부근에 나타난 수적선(水賊船) 5, 6척은 부안 지방을 도적질하고, 우리나라 상선을 약탈하였으며, 또 1609년(광해군 1년) 1월 27일에는 옥구 북쪽 진포에 있는 군산진 만호(万戸)가 해적에게 피살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때 군산진 만호가 해적에게 피살되자 국왕은 “국가의 큰 치욕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군산 지역의 해방(海防) 문제가 국가의 중대 문제로 부각된 것이다. 한편 옥구 북쪽에 있는 군산진은 군산창(群山倉)과 성당창(聖堂倉)을 관할하면서 조선 최대의 조창(漕倉) 관할 관청으로서 막중한 조운 업무도 처리해야 했다.
이에 육지에 있는 군산진 하나만으로 해방과 조운의 업무를 모두 처리하기가 어렵다는 인식이 나타났다. 그래서 진포의 군산진은 조운만 전담하게 하고, 군산 지역에 수군 진을 하나 더 설치하여 해방을 전담하게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따라 1624년(인조 2)에 군산도에 별장(別将)을 파견하여 진을 설치하였다.
본진(本鎭)은 천계(天啓) 갑자년(甲子年)에 소모별장(召募別將)을 설치하였는데, 이때는 단지 방패선(防牌船) 1척 만이 있었다.[『여지도서』, 보유편[전라도], 만경, 고군산진지]
인조 2년에 옛 진(鎭)에 별장(別將)을 두어 고군산이라 칭하였다.[『대동지지』, 만경, 고군산도진]
이와 같이 1624년(인조 2)에 군산도에 별장을 파견하고, 진(鎮)의 이름을 기존 진포에 설치된 군산진과 구별하고자 ‘고군산진’이라고 칭하였다. 이후 조선후기 동안 고군산진의 중요성은 계속 강조되었고, 군비(軍備)가 강화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乱) 직후인 1636년(인조 15)에는 고군산에 배치된 방패선을 전선(戦船)으로 바꾸었고, 1637년(인조 16)에는 새로 마련한 전선의 사부(射夫)·포수(砲手)·격군(格軍)[櫓軍]을 육지의 속오군(束伍軍)으로 채워주었다. 전선은 조선 후기 수군의 주력함으로서 흔히 판옥선(板屋船)이라고도 부르는데, 전선 1척에는 사부, 포수, 격군으로 이루어진 수군이 164명 승선하였다. 이러한 수군 정원을 속오군으로 채워준 것이다. 이로써 고군산진은 전선과 수군을 갖춘 강력한 수군 진이 되었다. 이후 1675년(숙종 1)에는 고군산진의 장관으로 종3품 수군 첨절제사(僉節制使)를 파견하였다. 진포의 군산진이 첨절제사 진으로 승격된 것이 1710년(숙종 36) 때이니, 나중에 생긴 고군산진이 원래부터 있던 군산진 보다 더 빨리 첨절제사 진으로 승격된 것이다. 이것은 고군산진의 해방 임무의 중요성 때문에 취해진 조처로 보인다.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続大典)』에는 고군산진에 전선(戦船) 1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이 배치되었다. 그런데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 요람(万機要覧)』에서는 고군산진에 전선(戦船) 6척, 병선(兵船) 6척, 방선(防船) 2척, 사후선(伺候船) 10척이 배치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당시 전라우수영이 전선을 2척 보유한데 반해 고군산은 전선이 6척으로서, 우수영보다 무려 3배 이상이나 많은 전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고군산진은 이때 조선 전 수군 진영을 통틀어 최대의 군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 무렵 이양선이 서해에 빈번하게 출몰하는 등 국가적 위기를 맞아 취해진 조처로 생각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만기 요람(万機要覧)』에 고군산진의 군선이 ‘전선 6, 병선 6, 방선 2, 사후선 10’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전선의 승선 인원이 164명, 병선이 17명, 방선이 31명, 사후선이 5명이므로, 당시 고군산에 있던 수군 병력은 총 1,198명[(6×164)+(6×17)+(2×31)+(10×5)]이나 된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고군산 지역에 1,000명이상의 군인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은 비정상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동아 일보』 1928년 6월 26일자 ‘도서 순례(島嶼巡礼): 고군산 열도(古群山列島)’ 특집 기사에는 선유도의 원로 송노인(宋老人)의 말이라고 하면서
‘수군영(水軍營)의 무긔로는 군함 삼십여 척이 잇으니 그 이름만 보아도 굉장하야 전병선(戰兵船), 귀선(龜船), 루선(樓船), 사후선(司候船) 등이 잇고 군사가 천여 명으로 본수군(本守軍), 파수(破手), 사부(射夫), 군관(軍官), 무사(武士), 도부수(刀斧手), 능로수(能櫓手), 긔수(旗手) 등이 잇서 삼국지에 잇는 적벽대전 광경을 연상케 합니다.’
라고 하여 고군산에 실제 1,000여 명의 군인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현지 주민의 목격담을 전하고 있다. 이로보아 19세기 초중 엽에 고군산진에 1,000명 이상의 군인이 주둔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러한 수군들은 전라도 각처에 거주하는 수군 직역 소지자들로 채워졌다. 즉 수군 군역은 원래 보인(保人)의 도움을 받는 호수(戸首) 군인들이 ‘분번입방(分番入防)’이라 하여 번(番)을 나누어 돌아가면서 입역(立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군인들이 직접 입역하는 대신, 이들에게 돈[番布]을 거두어 진(鎮) 소재지의 주민들을 고립(雇立)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1,000명 이상의 군인이 주둔하게 되어 있는 고군산진에는 엄청나게 많은 돈이 몰려들어왔다. 또 고군산진 부근의 주민들도 돈을 받고 수군 역에 종사하게 되면서 타 지역의 사람들보다 훨씬 풍요로운 생활을 누린 것으로 보인다. 1864년에 편찬된 김정호의 『대동 지지(大東地志)』에서는 고군산 주민들의 경제적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민들은 모두 부유하고 집과 의복, 음식의 호사스럽고 사치스러움이 성읍(城邑)보다 훨씬 더하다.(居民多富厚 其屋宅衣食之豪侈 尤於城邑)’
조선 후기 고군산 주민은 『여지 도서-보유편』「고군산진지(古群山鎮誌)」의 기록에 의하면 총 1,544명[남자 948, 여자 596]이 등록되어 있었는데, 남자들은 어업에 종사하면서도 한편으로 돈을 받고 수군 진에서 근무를 하여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군산 주민의 부유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영조 때 있었다. 1762년(영조 38) 고군산의 무사 김상건(金尚健)이 흉년에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쓰라고 하면서 쌀 1,300석(石)을 국가에 납부한 것이다. 『승정원 일기(承政院日記)』 기록에 영조 38년 11월 28일 당시 1석(石)은 15두(斗)이므로 1,300석은 쌀 1,950가마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이었다. 국왕은 김상건의 기부 행위에 감격하여 그가 비록 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첨사(僉使)나 오위장(五衛将)에 임명하라고 명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고군산은 최대의 수군진인 고군산진이 설치되어 있었고, 흉년에 쌀 2,600가마를 국가에 기부하는 사람이 나올 만큼 부유한 섬이었다.
[고군산진의 해체와 소실]
1895년 이른바 ‘을미 개혁’ 때 고군산진은 해체되고 만다. 1895년 3월 1일 총리 대신 김홍집(金弘集), 내무 대신 박영효(朴泳孝), 군무 대신 서리 권재형(権在衡) 등은 5도(都) 유수와 각 도의 관찰사를 비롯하여 각 읍진(邑鎮)의 수령·장관들이 사용하는 밀부(密符)와 병부(兵符)를 모두 회수하여 중앙에 반납하라고 지시하였고, 또 감영·유수영·병영·수영에 있는 마패도 모두 반납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지방군의 지휘명령 체계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후 일본 공사 이노우에[井上馨]는 박영효 등에게 “지방관 중에 아직도 병부를 이용하여 의병을 초모하고 병기를 매집하는 자가 있어서 민심이 흉흉하다는 정보가 있다”라고 하면서 후속 조치를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1895년(고종 32) 7월 15일에는 삼도 수군 통제영에 대한 폐지령과 더불어 「각 진보(鎮堡)에 대한 폐지령」이 함께 반포되었다. 각 진영에 소속된 장교와 병졸을 해산하고, 군물(軍物)·선박·관청 건물·토지 등 일체의 물건들을 군부나 탁지부에 이송하거나 관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해산 군인들이 휴대하였던 개인 군장이나 군기 등도 빠짐없이 반납하라는 「군부령(軍部令)」이 재차 반포되었다. 이로써 고군산진은 1624년(인조 2)에 설립한 지 271년 만에 해체되었다. 우리나라의 해방(海防)이 완전히 포기된 것이다. 대한 제국 시기에 들어와 고종 황제는 ‘전라북도 옥구부 고군산’에 포대(砲台)를 설치하라는 칙령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이것이 실현된 것 같지는 않다.
수군진이 없어진 고군산도는 1896년(고종 33) 칙령 제13호에 의해 전남 지도군(智島郡)에 편입되었고, 융희 3년(1909)에는 내각 총리 대신 이완용의 주도 하에 고군산진 등 지방 관청 건물들이 일반인에게 매각되었다. 이후 1914년 고군산도는 부군 폐합 시 옥구군 미면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86년에 대통령령에 따라 군산시 옥도면으로 승격된다. 한편 일반인에게 매각된 선유도 진말의 수군진 건물은 1927년 어린 아이의 불장난으로 소실되어 없어졌고 오늘날은 그 유지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