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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부터 마한까지, 해양 문화의 보고, 군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020
한자 先史-馬韓-海洋文化-寶庫-群山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선사/선사,고대/고대
집필자 곽장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견 시기/일시 1967년 - 고군산도 선유도 전월 마을 조개무지에서 빗살 무늬 토기편 발견

[개설]

우리나라는 바다로 갇혀있지 않고 바다로 열려있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은 바닷길로 해양 문물 교류가 활발했다. 옛날 고속 도로인 강과 바다는 일찍부터 문물 교류의 큰 통로였다. 우리나라에서 강과 바다를 하나로 묶어주는 천혜의 교역망이 구축된 곳이 군산이다. 그리하여 선사 시대 이래로 줄곧 군산이 해양 문화의 메카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금강(錦江)의 관문이자 새만금의 중심 도시인 군산은 환 황해권의 중앙에 자리한다. 군산은 남쪽의 만경강(万頃江)과 동진강(東津江), 북쪽의 금강, 서쪽의 연안 항로 등 4개의 옛날 고속 도로를 거느린 교통의 중심지이다. 삼국 시대까지는 연안 항로가 그 이후에는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군산도를 경유하는 사단 항로가 발달하였다. 군산은 또한 군산도오식도, 비응도 등 많은 섬들과 넓은 갯벌을 발판으로 해양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달한 곳이다.

[해양 문화와 내륙 문화의 보물 창고]

기원전 7,000년경부터 시작된 신석기 시대는 토기의 발명과 간석기의 출현 등으로 상징된다. 이 시기의 초기에는 본격적인 농경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채집 경제에서 생산 경제로 탈바꿈하면서 정착 생활을 영위하는 생활 유적이 처음 등장한다. 그리하여 신석기 시대의 유적은 대체로 하천변이나 해안가에서 주로 발견된다. 금강의 관문인 군산은 리아스식 해안[rias式海岸]과 크고 작은 섬들이 많아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는 좋은 자연 환경을 갖추었다.

이를 증명해 주듯 1967년 군산도선유도 전월 마을 조개무지[貝塚]에서 빗살 무늬 토기[櫛文土器] 편이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진 뒤 가도내초도·노래섬·띠섬·비응도·오식도·개야도 등의 인근 도서 지역에서 대략 30여 개소의 신석기 시대 조개무지가 발견되었다. 이를 계기로 군산은 우리나라에서 신석기 시대의 조개무지가 가장 밀집된 곳으로 커다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제까지 전라북도 지역에서 발견된 40여 개소의 신석기 시대의 문화 유적 중 3/4 정도가 군산에 자리하고 있다.

흔히 조개무지는 과거 사람들이 굴이나 조개를 까먹고 버린 쓰레기 더미를 말한다. 군장 국가 공단 조성 지역에 대한 구제 발굴에서 20여 개소의 조개무지가 그 존재를 드러냈다. 군산 비응도 등 모두 20여 개소의 신석기 시대 조개무지가 발굴 조사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이 함께 밝혀진 것은 군산이 처음이다. 군산의 신석기 문화를 조명하기 위해 1995년 ‘군산 지역의 조개무지’와 1998년 ‘호남 지역의 신석기 문화’라는 주제로 군산 대학교 박물관 주관으로 학술 대회가 열렸다.

군산 가도·띠섬·노래섬·비응도·오식도 조개무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의 분석을 근거로 그 상한연대가 신석기 시대 전기인 기원전 40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이들 조개무지에서 토기류와 돌화살촉·돌도끼·굴지구·그물추 등의 석기류, 어로도구인 결합식 낚시와 물고기 해체에 사용된 골각기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참돔·민어·복어·상어·돌고래 등의 물고기 뼈와 멧돼지·사슴 뼈도 수습되었다. 군산은 천혜의 지정학적인 이점을 잘 살려 신석기 시대부터 서해안과 남해안의 해양 문화와 금강 상류·중류 지역의 내륙 문화 요소가 공존함으로써 신석기 문화의 다양성과 역동성이 입증되었다.

[철기 문화의 전파와 마한의 등장]

기원전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중국 연(燕)과 고조선(古朝鮮)의 무력 충돌로 고조선 유이민(流移民)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격변의 시기를 맞는다. 우리나라에서 덧띠토기[粘土帯土器]의 등장과 세형동검(細形銅剣)의 출현으로 상징되는 초기 철기 시대로 접어든다. 군산 도암리 주거지에서 구연부 외면에 원형 점토 띠를 덧붙인 덧띠토기 편이 출토되어, 금강 하구인 군산이 당시 외래 문화가 들어오는 주요 길목이었음이 입증됐다.

고조선 멸망 이후 준왕(準王)[?~?]의 남천으로 만경강 유역이 새로운 거점지역으로 급부상한다.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기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고 연나라 망명인 위만이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 좌우 궁인들과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한의 땅에 거했다. 스스로 한왕이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익산 신동, 완주 갈동·신풍, 전주 만성동 등 초기 철기 시대의 분묘 유적이 만경강 유역에서 대규모로 등장한다. 익산·완주·전주 일대가 당시 테크노 벨리로 급성장한 것은, 군산을 중심으로 이미 구축된 교역 네트워크와 관련이 깊다. 만경강 유역의 관문인 군산으로 서북한의 새로운 철기 문화의 전파로 만경강 유역에서 초기 철기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고조선 유이민의 남하로 청동기 시대 송국리 문화가 쇠퇴하고 지석묘 사회가 급격히 해체되면서 새로운 질서의 재편 과정은 마한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기원전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중국 연과 고조선의 무력 충돌로 고조선 유이민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격변의 시기를 맞는다. 우리나라에서 덧띠토기의 등장과 세형동검의 출현으로 상징되는 초기 철기 시대로 접어든다. 군산 도암리 주거지에서 입 부분[口縁部] 외면에 원형 점토 띠를 덧붙인 덧띠토기 편이 출토되어, 금강 하구인 군산이 당시 외래 문화가 들어오는 주요 길목이었음이 입증됐다. 그렇지만 여전히 발굴 조사가 미진해 초기 철기 시대 군산의 모습을 살필 수 없어 안타깝다.

[해양 세력으로 상징되는 마한의 소국들]

우리나라에서 서력 기원 개시 전후부터 300년경까지의 약 3세기 동안을 원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1970년대 고고학계에서 처음 제기된 시대 구분법으로, 삼국이 고대 국가 체제를 완성하기 이전까지 삼국 시대의 과도기적인 단계로 그 이전에는 철기 시대·삼한 시대·부족 국가 시대·성읍 국가 시대·마한·삼국 시대 전기 등으로 불렸다.

이 시기에는 청동기와 지석묘의 소멸, 철기 문화의 등장과 철 생산의 급증, 장인 집단의 출현, 농경 문화의 발전, 조개무지의 증가와 대형화, 전국계 토기 제작 기술의 영향으로 김해식 토기가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이전 시기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널무덤[木棺墓]과 덧널무덤[木槨墓], 독무덤[甕棺墓]가 더욱 대형화됐고, 여기에 지역성이 강한 주구움무덤[周溝土壙墓]와 분구묘(墳丘墓), 구덩식 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이 새롭게 출현한다. 군산은 마한의 표식적인 유물로 알려진 문살무늬[格子文]와 삿무늬[縄蓆文]가 시문된 적갈색 연질 토기(赤褐色軟質土器)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는 마한에 54개의 소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한의 영역이 오늘날 경기도 서해안·충청남도·전라북도·전라남도 등에 걸쳐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 소국은 대체로 현재 군 단위마다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철기 문화의 융성으로 토착 문화가 한 단계 더욱 발전했다. 금강의 관문인 군산에는 해양 교류 및 해양 경제를 발판으로 발전했던 두 세 개 이상의 소국들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군산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마한 소국들은 해양 세력이거나 아니면 해상 교역을 주로 하는 특수한 성격의 정치 집단으로 추정된다. 종래에는 김해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구 일대가 원삼국 시대인 삼한 때 가장 발전했던 거점 지역으로 널리 통용됐다. 최근 군산을 중심으로 한 금강 하구도 낙동강 하구 못지않게 마한의 해양 문화가 융성했던 곳으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삼한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 유적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 금강 하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한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학술 발굴은 전무한 실정이다.

마한의 묘제는 주구묘(周溝墓)와 분구묘, 독무덤이 있다. 주구묘는 눈썹 모양 도랑을 두른 형태로 그 매장 주체는 토광묘에서 점차 독무덤으로 변해간다. 1993년 군산 조촌동에서 주구움무덤과 독무덤이 함께 조사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분구묘는 먼저 흙을 쌓아 분구를 만들고 다시 분구를 파내어 매장 주체부가 조성된 것으로 그 평면 형태가 원형·방형·장방형·제형이 있다. 토광묘와 독무덤이 분구묘의 매장 주체부로 함께 사용된다. 군산에 마한의 지배자 혹은 지배층 무덤으로 알려진 마한의 말무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마한 지배층 무덤인 말무덤의 보고]

말무덤에서 ‘말’은 ‘머리’ 혹은 ‘크다’ 뜻으로 우두 머리에게 붙여진 관형사로 파악하여 그 피장자는 마한의 지배층으로 추정하고 있다. 흔히 왕사슴을 말사슴, 왕고추 잠자리를 말고추 잠자리, 왕매미를 말매미, 왕벌을 말벌로 부르는 것과 같다. 말무덤이라는 용어 속에 당시의 역사성과 그 중요성이 담겨있다. 군산 대학교 캠퍼스 내 미룡동 말무덤에 대한 학술 발굴에서 그 구조와 성격이 마한의 분구묘로 밝혀졌다. 군산 대학교에서 발굴비를 지원해 준 각별한 배려로 말무덤의 성격을 밝히는 데 큰 목적을 두고 순수한 학술 발굴이 추진됐다.

분구묘는 시신을 모시는 매장 주체부를 중심으로 그 둘레에 도랑을 두른 형태를 말한다. 하나의 커다란 분구(墳丘) 안에 그 조성시기를 달리하는 여러 기의 매장 주체부가 자리한다. 군산 미룡동에서는 토광묘와 독무덤 등의 매장 주체부에서 검은 간토기[黒色磨研土器]와 목항아리[短頚壷]가 출토됐다. 분구는 그 평면 형태가 남북으로 긴 장방형이며, 모두 9기의 토광묘와 합구식(合口式) 독무덤이 확인됐다. 유물은 흑색 토기(黒色土器)와 낙랑 토기(樂浪土器)의 속성이 강한 토기류를 중심으로 소량의 철기류도 출토됐다.

군산 지역 18개소의 분묘 유적에 30여 기의 말무덤이 분포되어 있다. 군산은 한마디로 말무덤의 왕국이다. 군산시 미룡동을 중심으로 개정면에서 5개소, 서수면·성산면·임피면·회현면에서 2개소, 개사동·개정동·옥구읍·옥산면에 1개소의 말무덤이 있다. 본래 바다와 인접된 것으로 추정되는 개정면 일대에 5개소의 말무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더욱 관심을 끈다. 군산 말무덤의 분포 양상을 근거로 당시 군산의 발전된 모습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군산시 옥구읍 이곡리임피면 읍내리 등 일부 평지에 자리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산줄기와 구릉지 정상부에 입지를 두었으며, 그 기수는 대체로 5기 내외로 미룡동의 경우만 10기로 가장 많다. 말무덤 주변 지역에 대규모 생활 유적이 자리하고 있어 마한의 분묘 유적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였다. 옥구권에 속한 개사동·미룡동 말무덤의 경우에는 산줄기 정상부에 말무덤이 자리하고 그 남쪽에 대규모 생활 유적이 있으며, 바닷가인 서쪽 기슭에는 조개무지가 위치해 서로 긴밀한 세트 관계를 보였다.

군산시 내흥동·신관동·조촌동, 수송동 둔율·축동, 대야면 산월리, 성산면 둔덕리, 서수면 관원리에서도 다양한 마한의 무덤이 조사됐다. 마한 부터 조선 시대까지 다양한 문화 유적이 조사된 서수면 관원리 유적이다. 임피권에 속한 곳으로 마한 주거지 28기와 구덩이[竪穴遺構] 10여 기, 굴식 돌방무덤[横穴式石室墳] 1기, 고려 부터 조선까지의 토광묘 5기, 돌널무덤[石棺墓]과 도랑[溝状遺構] 등이 조사됐다. 산줄기 정상부에 입지를 둔 굴식 돌방무덤은 백제 웅진기 유형으로 당시 백제의 중앙과 재지 세력과의 교류 관계를 규명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군산시 대야면 산월리에서는 분구묘와 독무덤이 함께 조사됐는데, 분구묘는 그 평면 형태가 방형으로 분구의 중앙부에 토광묘가 자리하고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군산 지역 주구묘와 분구묘는 구릉지와 산줄기 정상부에 입지를 두어 충청남도 서천군과 함께 금강 하류 지역의 강한 지역성이 입증됐다. 금강 하류 지역의 분구묘는 영산강 유역 대형 분구묘와 직접 관련된 것으로 수송동 축동에서 최고위층과 관련된 원통형 토기[墳周土器]가 그 모습을 드러내 큰 관심을 끌었다. 군산 지역 마한 묘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한마디로 다양성이다. 더욱이 말무덤의 성격이 마한의 상징적인 묘제인 분구묘로 밝혀져 군산이 또 다른 마한의 중심지였음을 뒷받침해 주었다.

[우리나라에서 구덩식 돌덧널무덤 밀집도가 가장 높음]

조개무지란 과거 사람들이 굴이나 조개를 까먹고 버린 쓰레기더미를 말한다. 마치 무덤의 봉분처럼 쌓여있다고 해서 조개무덤 혹은 조개더미라고 부른다. 지금부터 1만 년 전 쯤 자연 환경의 변화로 신석기인들이 바닷가에 모여 살면서 바다 자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출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6,000년 무렵부터 조개무지가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해 신석기 시대 동안 만들어진다. 우리나라에서 신석기 시대 조개무지에 대한 발굴 조사가 가장 많이 이루어진 곳이 군산이다.

조개무지에는 굴이나 조개 껍질이 토양을 알칼리성으로 만들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식용으로 이용하던 동물이나 어류의 아주 작은 뼈도 잘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토기류·석기류·골각기류·토제품 등의 생활도구를 비롯하여 고분과 주거지, 화덕 시설이 발견되기도 한다. 따라서 조개무지는 사람들이 남겼던 쓰레기장인 동시에 과거 생활과 문화 정보를 종합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보물창고이다. 군산 비응도 조개무지에서는 청동기 시대 인골이 거의 온전하게 보존되어 발굴단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만큼 조개무지는 역사책과 같은 것이다.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서는 농경 생활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조개무지가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청동기 시대 후기를 지나면서 새로운 철기 제조 기술이 유입되는 과정에 해로가 발달함에 따라 조개무지의 규모가 더욱 커진다. 이 무렵 금강과 동진강 하구에 조개무지가 폭발적으로 급증한다. 금강만경강 사이에 위치한 군산은 한마디로 ‘조개무지의 왕국’이다. 현재까지 한국 고고학계에 보고된 600여 개소의 조개무지 중 120여 개소가 군산에 자리한다. 우리나라에서 조개무지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 군산이다.

군산 지역의 조개무지에서는 표면에 문살무늬와 삿무늬가 타날 된 적갈색 연질 토기편이 유물의 절대량을 차지한다. 위에서 살펴 본 말무덤과 함께 마한의 역동성을 가장 잘 대변해 준다. 동시에 조개무지에서 수습된 유물과 똑같은 유물이 광범위하게 흩어진 200여 개소의 유물 산포지도 역시 중요하다. 원삼국 시대 문화 유적의 분포 양상을 근거로 평가한다면, 군산은 문화 유적의 밀집도가 낙동강 하구를 능가한다. 동시에 말무덤과 조개무지 등 문화 유적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여 두드러진 특징을 보인다.

그렇다면 군산 지역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하나는 소금 산지와 다른 하나는 소금 루트를 통한 교역 체계이다. 소금은 인간 생활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생필품이다. 그만큼 국가의 성장에 있어서 국력의 요체가 되는 소금 산지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아직은 우리나라에서 소금을 생산하던 제염 유적의 존재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중국은 산동 반도를 중심으로 한 강소성과 산동성에서 바닷물을 끊여 소금을 생산하던 제염 유적이 상당수 조사됐다.

일제 강점기 천일염이 생산되기 이전까지 바닷물을 끊여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바닷물과 나무의 확보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군산은 제염 유적과 관련된 최적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으면서 동시에 천혜의 교역망을 통해 군산에서 생산된 소금이 소금 루트를 통해 각지로 공급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기반으로 군산이 해양 경제와 해양 문화의 중심지로 발돋움했고, 마한과 관련된 100여 개소의 조개무지와 200여 개소의 유물 산포지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우리나라에서 마한과 관련된 문화 유적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 군산이다.

조개무지는 월명산(月明山)[101m]에서 영병산(領兵山)[117m]까지 남북으로 이어진 산줄기와 오성산(五聖山)[227m] 주변 지역, 나포면회현면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군산의 내륙 지역으로 그 위치로 볼 때 상당한 의문점을 자아낸다. 이처럼 군산의 내륙지역에서 조개무지가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대규모 간척 사업과 관련이 깊다. 군산대학교 캠퍼스 내 땅을 파면 갯벌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본래 군산의 자연 환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대목이다. 현재와 같은 군산의 해안선은 불이 농장(不二農庄) 등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대규모 간척 사업이 추진됨으로써 형성됐다.

예컨대 1920년~1922년 군산 불이 농장 간척 사업과 1938년 회현 간척 제방, 1970년대 군산 임해 공단 조성, 1988년부터 시작된 군산 2국가 산업 단지 조성이 가장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개사동 조개무지도 해안가에서 내륙으로 15㎞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군산대학교 서쪽을 감싸주고 있는 산줄기 서쪽 하단부로 본래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개무지와 흡사한 유물의 조합상을 보인 200여 개소의 유물 산포지는 대체로 조개무지와 인접된 곳에 자리한다. 따라서 해양 경제의 상징인 조개무지를 중심으로 말무덤과 유물 산포지는 서로 긴밀한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군산시 성산면 여방리 남전·둔덕리의 조개무지가 발굴 조사를 통해 그 성격이 밝혀졌다. 서해안 고속 도로 공사 구간 내에 두 개소의 조개무지가 자리하여 구제 발굴이 이루어졌다. 1996년 국립 전주 박물관 주관으로 구제 발굴이 이루어진 남전 조개무지는 고지성을 띠는 남해안과 달리 오성산 북동쪽 기슭 말단부에 자리한다. 구릉지의 북쪽 기슭에 입지를 둔 패각층은 청동기 시대 후기부터 6세기까지 크게 6개의 문화층으로 세분된다. 제 2 문화층에서 기대(器台)와 소형 토기(小型土器) 등 일본계(日本系) 토사기(土師器)가 출토되어, 당시 해상 교통로를 통한 일본과의 국제 교류가 유물로 입증됐다.

유물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끈 것은 골각 기류로 생활 도구인 칼 손잡이와 침, 화살촉, 무구인 복골이 상당량 출토됐다. 사슴과 멧돼지 중수골·중족골이 재료로 주로 사용됐다. 그리고 고래·개·수달·강치·고라니·노루·사슴·말·소 등의 포유류와 조류, 어류, 패류, 파충류 등이 더 있다. 돼지나 사슴의 견갑골, 소의 갈비나 견갑골 등 동물 뼈에 구멍을 뚫거나 불에 달군 도구로 지져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주술 도구이다. 오성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구릉지의 남쪽 기슭에서 남전 조개무지와 흡사한 성격을 띠는 둔덕리 조개무지가 조사됐다. 옥구권에 속한 가도 조개무지에서는 백제 때 인골이 수습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군산 매장 문화재에 큰 관심과 지원을]

지표 조사 및 발굴 조사에서 축적된 고고학 자료를 중심으로 선사 시대부터 백제까지 군산의 역동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군산은 금강·만경강·동진강을 따라 내륙 수로와 해상 교통로가 거미줄처럼 잘 갖춰져 선사 시대 이래로 줄곧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를 이루었다. 군산은 천혜의 지정학적인 이점을 배경으로 신석기 시대부터 서해안과 남해안의 해양문화와 금강 상류·중류 지역의 내륙 문화 요소가 공존함으로써 신석기 문화의 다양성과 역동성이 입증됐다. 초기 철기 시대 때는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철기 문화가 전래되어 금강만경강 유역이 테크노 벨리로 융성할 수 있도록 든든한 해양 교류 및 해양 경제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군산의 해양 경제와 해양 문화를 기반으로 마한 때 거점 지역으로 발돋움했다. 마한의 지배층 무덤으로 알려진 18개소의 말무덤과 수송동 축동·미룡동의 말무덤 학술 발굴에서 군산의 역동성이 입증됐다. 군산 개사동 조개무지와 남전조개무지 등 100여 개소의 조개무지는 군산에 지역적인 기반을 두고 발전했던 마한의 토착 세력 집단이 소금 생산 등 해양 경제를 기반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그 밀집도가 가장 높은 말무덤과 조개무지는 마한 때 군산의 역사적인 위상을 최고로 높였다. 금강의 관문인 군산에는 해양 경제 및 해양 문화를 토대로 발전했던 두 세 개 이상의 마한 소국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군산에 지역적인 기반을 두고 발전했던 마한 소국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학술 발굴이 조속히 추진됐으면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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