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025 |
---|---|
한자 | 寫眞-記錄-群山醫療史-年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조종안 |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의 근대적 의료 활동의 역사와 쌍천 이영춘.
[개설]
우리나라 첫 서양식 의료 기관은 1885년(고종 22) 2월 29일 미국인 의료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앨런(Horace N. Allen)이 고종의 윤허를 받아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에 개원한 광혜원(廣惠院: Widespread Relief House)으로 기록된다. ‘광혜’는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해 3월 12일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된다.
군산에서 최초의 서양식 진료는 미국 남장로교 의료 선교사 드루(A, D, Drew)에 의해서였다. 드루는 1895년 3월 전킨(W. M. Junkin) 선교사와 함께 군산 답사에 나서 오전에는 전도를, 오후에는 환자를 돌보았다. 그해 가을에는 군산진영(群山鎭營) 터가 있던 수덕산 기슭 초가를 매입하고, 1896년 4월 가족과 함께 군산에 정착한다. 드루의 의술이 용하다는 소문이 충청도까지 확산되고, 사람들은 감사의 표시로 달걀, 생선, 조개류 등을 가져왔다고 한다.
1899년 5월 1일 군산이 개항하면서 수덕산 일대가 조계 지역으로 지정되자 전도선이 정박하기 편리한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구암산[현 전라북도 군산시 구암동] 기슭에 건물을 짓고 예수의 번역 한자어 ‘야소(耶蘇)’를 붙여 야소 병원이라 하였다. 당시 구암리 지명이 궁멀 이어서 궁멀 병원으로도 불리었던 야소 병원은 기독교를 백안시한 일본의 압력으로 구암 병원이라 하였다. 날로 번창하던 구암 병원은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1939~1945]을 일으킨 일본이 의료 선교사들을 체포, 감금하고 강제로 추방하면서 1941년 역사 속에 묻히고 만다.
[군산의 첫 개인 병원은 카타기리[片桐] 진찰소]
군산의 최초 개인 병원은 1900년 봄 일본인 카타기리[片桐] 개소한 카타기리 진찰소였다. 그러나 1년 후 유끼야마(行山)에게 양도되어 1901년 군산 병원으로 바뀐다. 개항기 군산에는 동경 의학 전문 학과를 졸업한 도쓰가요 시이지[戶塚嘉一]가 1904년 7월 지금의 명산동에 개업한 붕운당(鵬雲堂) 병원과 1906년 가을 후쿠오카 출신 사사키[佐佐木]가 군산 거류민 지회 보조금을 받아 개업한 사사키 병원[佐佐木病院], 1907년 개원한 민단립 병원(民團立病院) 등이 있었다.
1914년 12월 군산에는 사립 병원 3곳, 의원 2곳, 산파 4곳, 약종상 8곳이 있었으며 종사하는 의사는 의학사 1명, 의사 6명, 의생 2명과 간호부 3명, 약제사 2명이 전부였다. 산파 개업이 4곳이나 되어 여성들의 분만을 도왔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지방 진료소들은 초가 한 채에 한 명의 의사가 근무하는 1인 의사 병원[one man-hospital]을 중심으로 순회 진료가 함께 시행됐으며, 환자 방문 진료 형태는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조선인으로 군산에 최초로 병원을 개업한 의사는 육기병[1874-1935]이었다. 1920년 옥산 의원을 개업한 육기병은 서울 출생으로 한학자였으며, 다년간 약방을 경영했던 검정의 출신으로 1935년 사망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의사를 의학사, 의사, 의생으로 분류해서 칭했으며 약사는 약제사, 간호사는 간호부라 했는데, 간호부들은 몸뻬라는 일본식 통바지를 입고 근무했다 한다.
[일제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세운 자혜 의원]
경술국치(1910) 이후 군산을 쌀 수탈의 전진 기지로 삼은 일본은 인구가 급격히 늘자 자국민의 의료 혜택을 위한 현대식 병원 설립을 계획하고 1921년 5월 지금의 군산 해양 경찰서 자리를 병원 부지로 매입한다. 그해 10월에는 조선 총독부 제령으로 군산 자혜 의원(慈惠醫院) 설치의 건을 포고하고 건물 신축 공사를 시작, 1922년 2월 15일 관립 군산 자혜 의원을 개원한다.
1922년 8월 진료를 시작한 군산 자혜 의원은 부지 4818평에 건물 5동과 본관, 전염병실, 간호부 기숙사, 소독실, 영안실, 해부실 등을 갖추고, 기숙사 3동을 따로 지었다. 1925년 4월 1일 조선 도립 의원 관제가 공포되면서 4월 15일 군산 자혜 의원은 군산 도립 의원으로 개칭된다. 그 후 환자가 증가하면서 업무량이 늘자 1929년에는 병실 1동, 기숙사 1동, 매점 1동을 중축하였다.
1941년 조선 총독부 후생국 위생과가 작성한 「조선 도립 의원 요람」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자혜 의원 증설이 필요했다’면서, ‘도립 의원은 원래 도 자혜 의원으로 칭했으며 국가경영에 속한 것이었으나 1925년(대정 14) 도(道) 경영으로 이관됨과 동시에 도립 의원으로 개칭된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군산 도립 의원 운영 체제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지방공사 전라북도 군산 의료원으로 전환되는 1983년 7월 1일까지 이어진다.
[청년 의사 이영춘, 친구들 만류에도 시골행 결심]
쌍천(雙泉) 이영춘(李永春)[1903~1980]은 1935년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면[현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동] 구마모토 농장[態本農場] 부속 자혜 진료소 소장으로 초빙되어 일생을 농촌 보건사업에 헌신한다. 해방 후에는 자혜 진료소를 모체로 개정 중앙 병원, 개정 농촌 위생 연구소, 개정 간호 전문 대학, 화호 여자 중·고등학교, 개정 뇌병원, 시그레이브 기념 병원 등 수많은 학교와 의료 시설을 설립하여 후배 의사들의 본보기가 됐고, 학계는 물론 소시민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호남 일대 농지 개발의 유망성을 일찍이 간파한 구마모토[態本]는 1903년 10월 광활한 개정 들녘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금의 군산시 개정동 장군봉 아래에 대규모 농장[구마모토 농장]을 개설한다. 옥구, 김제, 정읍 등에 경작지 3천 정보와 소작농 3천 가구, 2만여 명의 일꾼을 거느리는 대농장주가 된 구마모토는 소작인 가족의 건강 관리와 질병 치료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1934년 9월 이영춘은 최소한 5년 이상 진료해달라는 당부, 월급 150원[당시 일본인 고등관 의사 대우], 10년이 지나면 농민의 보건 위생을 위한 학술 조사 및 연구할 연구소를 설립해주겠다는 구마모토의 약속을 받고 세브란스 의전에서 배운 인술을 농촌에 심기로 결심한다. 첫 대면에서 '월급은 얼마를 원하느냐?' 고 묻는 구마모토에게 ‘나는 월급을 목적으로 귀하의 요청을 수락하는 것이 아니고, 무료 진료 의사로서 수락한 것이니 귀하는 나를 아사(餓死)시키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고 대답했다 한다.
1930년 여름 황해도 평산 주재 공의(公醫)와 그곳에서 3년을 개업의로 있는 동안 빈곤과 무지, 질병에서 신음하는 농민들의 실상을 목격하고 가슴 아파하던 이영춘에게 농촌 무료 진료 사업은 잠시 동요되었던 마음을 환기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이영춘의 친구들은 농촌 진출을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한다. 그러나 은사 윤일선과 선배 김명선은 농촌 보건 문제는 미개척 분야이니 뜻있는 청년으로 도전해볼 만한 사업이라며 찬성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이영춘 역시 평소 농민의 심신(心身)이 건전할 때 희망과 광명의 날이 있을 것이라 믿어 농촌 무료 진료에 몸 담게 되었다.
[농장에 도착하는 날부터 진료 시작]
1935년 4월 1일 새벽. 밤새도록 기차를 타고 온 이영춘은 군산에서 약 4㎞ 떨어진 개정역에 도착하여 마중 나온 농장 직원이 건네주는 작은 전단지를 받아든다. 작인(作人)들에게 세브란스 의전 이영춘을 초빙하여 진료를 시작한다고 알리는 안내장이었다. 구마모토 초대로 지난해 10월 다녀가서 초행은 아니지만, 드넓은 평야와 논 사이로 흐르는 수로까지 고향 마을[평안남도 용강군]과 흡사해서 정겨움을 느낀다. 더욱 친근한 것은 조선 농민들의 비슷한 생활 모습이었다. 가난까지 비슷했다.
공동 묘지가 있는 마을을 끼고 돌아 구마모토 농장에 도착하니 이른 아침인데도 지게 위에 이부자리를 깔고 걸터앉은 노인, 소달구지에 이불을 깔고 누운 환자 등 많은 사람이 진료를 받기 위해 몰려 있었다. 직원은 며칠 전부터 진료권을 발부했다고 귀띔했다.
이영춘이 처음 받은 환자는 지경[현 대야면]에 사는 소작농 최종국이었다. 이영춘은 회고록에서 최씨는 수년 후 작고했으나 그 가문과는 해방 후까지 친교를 지속했고, 후손 중에는 언론인, 은행가도 배출됐다고 술회했다. 1935년 8월에는 농장 사무실을 빌려 쓰던 진료소 건물[39평]이 완공돼 진찰실, 도서실, 약국, 수술실, 실험실 등을 구비하고 진료소 면모를 갖춘다. 경성[서울]에서 내려온 최신은 간호부[간호사]도 합류하고, 이영춘이 거주할 사택[20평]도 신축하여 서울에 있던 가족도 내려와 함께 정착하게 된다.
[결핵, 매독, 기생충은 3대 민족의 독(三大 民族의 毒)]
이영춘의 하루는 통행 금지 해제와 함께 시작했다. 이영춘이 소장으로 부임하던 1935년 진료 환자는 연인원 3만 명이었다. 소작인 가족당 1.5회 진료 받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소작인을 가장하여 진찰권을 빌려 오는 환자도 많았다. 그러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진료했다. 지역 농장 작인에게도 균등하게 혜택을 주기 위해 정읍 화호, 완주 상관, 옥구 지경, 대야 등 4개소 지장에도 최소한의 약품과 의료 기구를 비치하고 조수 채규병과 함께 정기적으로 진료를 나갔다.
대표적인 교통 수단이 인간의 다리였던 1930년대 조선의 농촌은 십리 길도, 백리 길도 예사로 걸어 다녔다. 이영춘에게는 자전거가 한 대 주어졌으나 매일 환자를 진료해야 하는 처지에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도 환자가 발생하면 험한 시골 길을 한달음에 달려갔다. 당시 환자들 질병 종류는 신경병, 피부병, 안이질, 외상, 소화 불량, 호흡기 질환 등 비위생 환경, 부주의, 노동 등으로 인한 질환이 많았다,
특히 기생충, 결핵, 매독 환자가 많음에도 농민들이 예사로 알고 있어 가슴이 아팠다. 이영춘은 훗날 ‘체력을 소모하고, 체질을 저하시키는 결핵과 매독, 유아(幼兒)의 발육과 성장을 억제하는 기생충[회충, 십이지장충, 간 디스토마] 만연은 농촌의 피폐를 뜻하는 그래프로 결핵, 매독, 기생충을 3대 민족의 독(三大 民族의 毒)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아동 위생과 보건에 특별한 관심 둬]
1936년은 최악의 가뭄으로 농촌의 기근이 심화되고, 민심도 흉흉해졌다. 따라서 1937년 춘궁기에는 보리죽 먹기도 어렵게 되었다. 가뭄 피해는 개정이라고 피해가지 않았다. 발육기의 개정 초등학교 아동들이 점심을 굶는 광경을 애처롭게 지켜보던 이영춘은 학교 창고에 취사장을 만들어 주먹밥 한 개와 소금을 결식아동 340명에게 3개월간 급식하여 우리나라 학교 급식의 효시가 되기도 하였다.
이영춘은 진료소 부임 초부터 개정 초등학교 교의(校醫)로 매년 신체 검사를 하였다. 1938년 5월에는 전교생[당시 560명] 대상 정밀 검사에서 결핵과 화농성 질환이 많은 사실을 밝혀내고 그 결과를 신경(新京)에서 열린 만선 의학회와 일본 학생 위생 총회때 보고하였다. 1939년에는 농장주 구마모토를 설득하여 한국 최초로 20평 규모의 위생실[양호실]을 지어주고, 1941년에는 대야 초등학교에 양호 교사를 배치하는 등 아동 보건에 힘썼다.
1938년 8월 3일~13일까지 자바[인도네시아 부속 섬]에서 열리는 동양 농촌 위생 회의[국제 연맹 주최]에 참석한다. 일본 정부 대표들과 부산에서 합류하여 20일 만에 자카르타 항에 도착하여 친족과 자국 영사관의 환영을 받으며 모두 하선하고, 이영춘 혼자 선실(船室)에 남아 나라 없는 국민의 비애를 처음으로 통절히 느꼈다고 한다.
1941년 4월에는 세브란스 출신 김성환을 전라북도 정읍 화호 진료소로, 1942년 10월에는 김경식을 지경 진료소로 초빙하였다. 정읍 화호 등 농장 소재 3개 학교에 위생실을 신축하고 양호 교사를 둔 것도 1942년이었다. 1942년 가을 임충정(林忠正) 옥구 군수가 찾아와 ‘지난 봄 실시한 신체 검사에서 갑종(甲種) 합격자가 옥구군 10개면 중 개정면이 가장 높다’며 심심한 사의를 표했다.
[아호 쌍천(雙泉)은 지인의 선물]
1944년 3월에는 오영태(吳永泰) 개정 면장이 방문하여 ‘전년도 개정면 내 일곱 개 마을 주민 9,000명의 사망 실태를 조사한 결과 구마모토 농장 전속 소작인 거주 3개 마을[개정, 하동, 옥석]은 다른 마을에 비해 사망률이 3분의 1로 감소하였고, 소작인이 절반쯤 거주하는 운회 마을은 2분의 1로 감소하여 그 차이가 현저하다’며 보고 겸 치하를 해주었다.
오영태 면장은 1898년(광무 2)에 태어났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옥구군 임피면 출신 경성[서울] 유학생[채만식, 채금석 등] 중 맏형이었다. 오영태는 경성 고보를 졸업하고 옥산 공립 보통학교[현 옥산 초등학교] 교장과 군산 상업 고등학교 설립 이사를 역임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이영춘이 설립한 재단 법인 농촌 위생원 이사를 지낼 정도로 둘 사이 친교가 두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기할 대목은 구마모토 농장 설립 연월인 1903년 10월이 이영춘의 생년월(生年月)과 일치하고, 이영춘이 정착한 마을 지명도 우물[샘]이 열린다는 뜻의 개정(開井)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뜻에서 착안했는지 모르겠으나 오영태가 이영춘에게 아호 ‘쌍천(雙泉)’[두 개의 샘이란 뜻. 하나는 영혼을, 하나는 육신을 살리는 의미]을 선물했고, 1972년 오영태가 뇌출혈로 갑자기 세상을 뜨자 이영춘이 애통해하며 호상(護喪)을 맡아 빈소를 지켰다 한다.
[인술과 의사 정신을 농촌에 심은 한국의 슈바이처]
이영춘은 1940년 10월 조선 농촌 위생 연구소 설치안을 구마모토에게 제출하고, 본격적인 치료와 예방 사업, 결핵 요양소 설립 등을 촉구하며 부임 조건임을 상기시켰다. 연구소 설치안은 구마모토의 언약이기도 했다. 구마모토는 ‘이박사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겠으나 지금 전쟁[태평양 전쟁]이 격화되고 있어 사업가들은 수익의 8할이 세금으로 납부되기 때문에 요청을 수락하면 농장은 연구소의 부속 사업이 될 수밖에 없다’며 서류를 반려했다.
가끔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할 때 구마모토는 이영춘에게 일본인으로서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조선 민중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여 기독교 성직자들이 수난을 당할 때도 농장 직원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당국에서 강요당한 적도 없었다고 한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구마모토는 쌍천에게 '조국의 해방을 축하한다'며 진료소 시설[재고 15만 원]을 자본으로 적당한 장소에 개업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한다. 그러나 자신의 영리보다 이웃을 더 생각했던 이영춘은 농촌 의료 사업의 사회성을 강조하면서 거절한다. 봉사 정신 하나로 인술을 농촌에 심은 이영춘은 해방 후에야 꿈을 이룬다. 1948년 7월 농촌 위생 연구소를 설립한 것이다. 그때부터 이영춘은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가난한 시골의 작은 진료소를 가장 보람 있는 일터로 생각했던 이영춘의 인술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도와줄 선교 의사를 찾는다는 선교회 책자를 보고 주의 부르심에 응하여 대답하고 결정한 슈바이처 정신을 연상시킨다. 또한, 헐벗고 굶주리는 농민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생애를 바친 이영춘의 삶은 카누를 타고서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검은 대륙 오지 오고웨 강변의 랑바레네(Lambarene)에서 무지한 흑인을 위해 자신을 불태운 슈바이처와 너무도 흡사하다.
[평소 꿈이었던 농촌 위생 연구소 설립]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모교인 세브란스 의전과 군정청 등 학계와 정계에서 와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농림부 차관 자리를 제의받기도 했으나 농민(農民)은 민족(民族)의 원천(源泉)임을 강조해왔던 이영춘은 농촌에서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사양한다. 소문을 듣고 달려와 ‘우리를 버리고 떠나지 마시라’는 소작인들의 간청도 저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1948년 11월 7일 6천여 명의 주민과 학생 내빈이 참석하여 농촌 위생 연구소 개소식과 개정 중앙 병원의 낙성식을 가졌다. 이날 참석자들은 서슬이 시퍼런 일제하에서 잊고 있던 전통 민속 무용으로 여흥을 즐기면서 신생 대한민국 국민의 감격을 맛보았다. 특히 인근의 개정, 옥산, 성산면 주민이 행사를 공동으로 주관해서 의미를 더했다.
내빈으로는 조봉암 초대 농림부 장관을 비롯해 이요한, 조한백 등 제헌 의원 10여 명, 신현돈 도지사 등 기관장 다수가 참석하였고, 김구 선생, 신익희 국회 의장, 이범석 국무 총리는 축사를 보내 새로운 연구소 출발을 축하해주었다.
농촌 위생 연구소 설립은 더욱 조직적이고 과학적으로 농촌 보건 의료 사업을 실행하기 위함이었다. 하여 농민에게 치료와 예방 사업을 동시에, 같은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벌였다. 이를 시발점으로 이영춘은 1980년 타계하는 날까지 농촌 보건 의학에만 몰두하게 된다.
[해를 거르지 않고 설립되는 학교와 의료 기관 ]
1949년에는 화호 진료소가 정읍, 신태인, 부안 지역 주민의 기대와 기쁨 속에 중앙 병원으로 승격되고 건물도 중축된다. 진료 과목은 내과, 소아과, 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등으로 개정에 이어 두 번째 종합 병원이었다. 농촌 의료 시설에 취업하려는 간호사가 없어 애통해하던 중 1949년 정부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3년제 개정 간호 고등 기술 학교[현 군산간호 대학]를 설립하고 1951년 첫 신입생을 모집한다. 이영춘은 아침은 죽 저녁은 밥으로 지내면서도 감사했다 한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지 부산에서 조병옥 내무부 장관 요청으로 국립 경찰 병원 창설에 참여한다. 1950년 10월 개정으로 올라온 이영춘은 1951년 6월 익산군 팔봉과 김제군 죽산에 진료소를 신설한다. 1951년 9월 대한민국 보건부[현 보건 복지부] 동의하에 농림부로부터 재단 법인 농촌 위생원 설립 승인을 받는다. 그해 12월에는 지역민의 간청으로 옥구군 임피 진료소를 신설하고, 청년들 관심을 농촌으로 모으기 위해 농촌 위생 연구 학술지 『농촌 위생』을 발간한다.
1952년 3월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에 농촌 보건원을 개원하고, 1954년 8월 민간 기관으로는 전국 최초로 개정 보건소를 설립한다. 1955년 3월 전라북도 정읍 화호에 화호 여자 중학교를, 1961년 5월 화호 여자 고등학교를 세운다. 1955년에는 교통이 불편한 경상남도 산청, 충청북도 옥천, 충청남도 서천, 전라남도 진도, 장성, 전라북도 진안 등 6개 군(郡) 23개 마을로 3개월 동안 무료 진료를 나가 환자 6,259명을 치료하였다. 무의촌 벽지와 섬으로 무료 진료를 나가면 주민들이 반기면서 기뻐했다.
1956년에는 군산 사범학교 졸업반 학생들과 전라북도, 충청남도 일부 지역 교사들까지 참여시켜 보건 강습회를 개최했다. 강습회는 교사들 사이에 학교 보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고조시켰고, 어린이들의 건강 증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영춘은 1929년 3월 세브란스 의전 졸업식장에서 ‘병은 치료보다 예방이 더 중요하다. 공중 보건은 의학 연구의 최종 목표다’라는 내용이 들어간 에비슨(O.R Avison) 교장의 훈시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수시로 고아원[보육원]을 방문하던 이영춘은 한 살 전후 영유아가 1년에 수십 명씩 사망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1957년 8월 군산 시내에 한옥을 얻어 30여 명의 영유아를 수용한다. 이듬해에는 도지사 인가를 얻고 1963년 개정으로 옮겨 일심 영아원(一心嬰兒院)이라 칭한다.
사회가 다양화되면서 정신 신경계 환자가 매년 증가했으나 지역에 마땅한 치료기관이 없어 고민하던 중 서울대 정신과 남명석 주임 교수로부터 전문의를 확보해줄 터이니 신경 정신과를 신설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결핵 병동을 개조하여 1961년 3월 개정 뇌병원을 개원한다. 훗날 개정 신경 정신 병원으로 명성을 떨쳤던 개정 뇌병원은 소외되고 방치됐던 호남의 정신과 환자들에게 희망이었다. 특히 각종 정신 질환을 진단할 수 있는 뇌파 검사기와 85개 병상을 갖춰 충청남도와 전라남도 일부 지역 환자들까지 입원과 통원 치료를 병행할 수 있었다.
1962년에는 실무 경험이 있는 간호사를 선발하여 강습회와 실습을 통해 유능한 보건 간호사 양성에 주력하면서 세브란스 병원 간호 과장을 지낸 이성덕 간호사를 간호 학교 교장으로 임명하여 여성 교육 책임은 여성 지도자가 해야 한다는 평소 숙원을 달성한다.
1964년 3월부터 연세 대학교 의과 대학[기생충학]으로 강의를 나가면서 사단 법인 대한 기생충 박멸 협회 회장으로도 활동한다. 1965년 7월에는 일본 기생충 예방회 초청을 받고 방문하여 한국의 기생충 박멸 운동을 주제로 특별 강연을 한다. 이영춘이 농촌 위생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는 세상을 뜨던 해[1980년]까지 한양 대학교 의과 대학 기생충학 외래 교수였던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골든 씨그레이브 박사 승계자로 선정]
버마[미얀마]에서 평생 농촌 의료 봉사와 간호 교육 사업에 헌신하던 미국인 의료 선교사 골든 씨그레이브(Gordon S. Seagrave) 박사가 1965년 타계하자 그를 돕던 후원회(AMCB)는 기금을 한미 재단(AKF)을 통해 아시아 국가 중 기독교 정신의 병원을 선정해서 시그레이브 박사 선교정신을 잇도록 하였다. 기금은 우여곡절 끝에 개정 병원에 기증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해서 1970년 8월 1일 UN군 사령부와 보사부, 한미 재단 등 고위 인사들과 주민이 참석한 가운데 개정 중앙 병원 자리에서 시그레이브 기념 병원 개원식이 열린다. 2천 500평이 넘는 대지에 건평 970평, 지상 4층 지하 1층, 96개 병상을 갖춘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그러나 시그레이브 병원은 재단 법인 농촌 위생원에서 분립하고 이영춘은 운영권을 잃게 된다.
1958년 설립된 일심 영아원도 건평 2백 9평의 단층 슬라브 건물로 준공되어 건물 기증자인 모세스(Moses) 이름을 따 모세스 영아원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1972년 8월을 기해 개정 중앙 병원은 시그레이브 기념 병원으로, 일심 영아원은 모세스 영아원으로 명칭과 더불어 재단과 경영자가 바뀌게 된다.
[사랑의 인술(仁術) 심었던 그 땅에 묻히다]
시그레이브 병원 개원식 이후 이영춘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최신 의료 장비와 의료서비스, 우수 의료진 등을 갖춘 병원으로, 새로운 도약기가 시작됐음에도 이영춘의 가슴에는 회의가 밀려온다. 지금껏 해온 일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이었는지 의구심이 들면서 자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괴로울 때는 형님[이영기]과 바둑을 두며 울적한 심사를 달랬다.
노여움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이 없고, 가장 큰 불만의 표시는 혀를 끌끌 두어 번 차는 게 고작이던 이영춘은 서예와 정원수 손질 등으로 소일하다가 1980년 11월 25일 개정 병원 구내 자택에서 갑작스러운 천식 발작으로 유명을 달리한다. 향년 77세. 당시 정부는 국민 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고, 수많은 제자와 선후배들의 애도, 지역민들의 슬픔 속에 장례식을 치른다.
세계적인 명성에도 서민으로 살면서 농촌 봉사만 해왔던 쌍천 이영춘이 세상을 뜨면서 남긴 재산은 농촌 위생원 하나뿐이었다. 그나마 사유 재산이 아니어서 남은 가족이 한동안 비참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던 일화는 듣는 이들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이영춘의 삶은 거창하지 않으면서도 위대했고,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의 무한한 봉사 정신은 모든 학술이 돈벌이 도구로 전락해버린 요즘 세태를 꾸짖는 듯하다. 불의와 영합하거나 도덕성이 마비된 자들에게는 이영춘의 작은 목소리도 천둥 소리처럼 들렸으리라. 병들고 가난한 농민을 사랑하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농촌 아동들의 건강을 위해 헌신했던 쌍천은 농민을 위해 희생했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영춘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김경식 박사의 회고담이다.
김경식은 이영춘의 세브란스 의전 13년 후배이다. 그는 ‘빈궁과 질병과 무지의 삼중고에 시달리며 최저의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농민을 위해 헌신, 봉사하는 것이 젊은 의사들의 사명’이라며 함께 일하자는 이영춘의 권면에 감명받아 돕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이영춘이 농촌의(醫)가 되었던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 후에도 한국은 농경 사회가 계속되어 농민이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했다. 그가 만약 현시대 의학도였다면 공업 단지 부근의 가난한 근로자들을 위해 공단의(醫) 길을 걸었을 것이라 추정해본다.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난 쌍천 이영춘은 지금 옛 개정 병원 뒷산 양지바른 언덕[현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동 장군봉 기슭]에 잠들어 있다. 세브란스 의전 교수를 박차고 벽지에 뛰어들어 영면하는 날까지 농촌을 사랑하고 농민을 사랑했던 이영춘은 그래서 흙냄새 풍기는 개정 땅에 묻혔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