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3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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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1872年地方圖全羅右道群山陣地圖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병남 |
[정의]
1871년(고종 8)에 ‘열읍지도(列邑地圖) 등상령(謄上令)’으로 이듬해인 1872년에 전라도 각 부(府), 군(郡), 현(縣), 진(鎭)에서 만들어 올린 채색지도 중 군산진의 지도
[개설]
지도에 만든 때가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같이 실려 있는 「진도부지도」의 건치연혁에 ‘동치 5년 병인에 부로 승격하였다[同治 五年 丙寅 陞爲府]’고 되어 있음을 보아 1866년 이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표현 양식은 약간씩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관읍(官邑)과 산천(山川), 도로(道路), 봉수대(烽臺), 창고(倉庫), 장터(場市), 면리(面里), 관읍(官邑)과 각 면(面), 지역 사이의 거리, 경계(境界)까지의 거리 등이 표시되어 있다. 또 지도의 여백에 약간의 항목 차이가 있으나 건치연혁, 정도(程途), 산성(山城), 봉수(烽燧), 선척(船隻), 관방(關坊) 등이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군산진처럼 해안·섬의 군현이나 진(鎭)의 지도에는 수로(水路) 및 수심(水深)도 밝혀져 있다. 지역 표시도 면(面)까지만 밝힌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면(面) 이하 리(里)·동(洞)까지 표시하여 상세하다.
[형태]
필사본으로, 크기는 35cm×25cm이다.
[구성/내용]
군산진은 전라도 옥구현에 위치한 수군 진영으로 지금의 군산시 장미동 일원에 해당한다. 군산은 금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수운의 요충지이다. 원래 만경(萬頃)에 소속되었던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있었는데 해적의 침입이 빈번하자 1701년(숙종 27)에 이곳으로 옮겼다. 다시 1710년(숙종 36)에는 만호진(萬戶鎭)에서 첨사진(僉使鎭)으로 승격시켜 조운(漕運)의 관리를 겸하게 하였다. 지도가 그려질 당시의 상황을 보면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 능노군(能櫓軍) 245명, 조선(漕船) 19척, 조군겸포수(漕軍兼砲手) 304명, 세봉(稅捧) 19,000석 등이 있었다.
지도는 바다가 위치한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여 군산진과 전면의 도서(島嶼)까지 한눈에 들어오도록 그렸다. 진기(鎭基) 둘레의 산을 둥글게 그려 내부 공간을 부각시켰다. 특히 이곳은 조운을 담당했던 곳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건물이 주를 이루었다. 조세 업무를 담당하던 봉세청(捧稅廳), 세미(稅米)를 보관하던 세고(稅庫), 조운(漕軍)들을 관할하던 조복청(漕復廳), 사공을 관할하던 사공청(沙工廳) 등은 다른 고을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건물들이다. 강 연안에는 조운을 담당하던 배를 그려놓기도 했다. 금강 하구의 내해문(內海門)에 위치한 해망정(海望亭)에는 적의 침입을 관찰하던 망대(望臺)가 있었다.
이외에 군산진과 관련된 지명과 건물명 등을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가내항(加乃項), 가도(駕島), 강변리(江邊里), 개도(介島), 거석리(擧石里), 경장리(京場里), 경포리(京浦里), 구영리(舊營里), 군기(軍器), 금강하류(錦江下流), 내아(內衙), 내영리(內營里), 당산(堂山), 대로(大路), 대죽도(大竹島), 둔율리(屯栗里), 만경고군산(萬頃古群山), 명서도(明嶼島), 봉대(烽臺), 비우정(備虞亭), 비응도(飛鷹島), 사정(射亭), 상정리(上井里), 서천포(舒川浦), 석서(石嶼), 세고(稅庫), 소강청(少江廳), 소죽도(小竹島), 아문(衙門), 아사(衙舍), 오성산(五聖山), 오식도(筽食島), 옥구읍(沃溝邑), 외해문상경수로(外海門上京水路), 이청(吏廳), 입이도(入耳島), 장암(長巖), 장청(將廳), 죽성리(竹城里), 중정리(中井里), 진구미(津仇味), 책실(冊室), 초도(草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