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4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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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群山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종수 |
[정의]
조선 전기 군산 지역에 설치한 수군진.
[개설]
1408년(태종 8) 옥구의 수영(水營)이 무안 대굴포로 옮긴 이후 군산 지역의 해상 방어 및 조운(漕運)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1426년(세종 8) 이전에 옥구현 북쪽 진포에 설치한 수군진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시대 수군(水軍)은 외적의 침략을 해상에서 제압함으로써 외침을 막는 국방의 임무와 국가의 조세미를 신속히 운반하여 경제를 안정시킬 두 가지 임무가 있었다. 특히 군산진은 이 두 가지 임무를 동시에 맡고 있었다.
[관련 기록]
1426년(세종 8) 『세종 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군산조(條)에는 중선 4척, 별선 4척 등 전선 8척에 수군 461명이 상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군산포는 종4품 수군 만호(萬戶)가 거느리고 대맹선(大猛船) 1척, 중맹선(中猛船) 2척, 소맹선(小猛船) 1척, 무군소맹선(無軍小猛船) 4척 도합 8척의 전선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1408년(태종 8) 옥구현에 있었던 전라 수영(水營)이 무안 대굴포로 옮긴 이후 군산 지역의 해상 방어 및 조운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1426년(세종 8) 이전 어느 시점에 옥구현 북쪽 진포에 설치한 수군진이다.
『세종 실록 지리지』에는 당시 군산진에 중선 4척, 별선 4척 등 전선 8척에 수군 461명이 상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15세기말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군산포는 종4품 수군 만호(萬戶)가 거느리고 대맹선(大猛船) 1척, 중맹선(中猛船) 2척, 소맹선(小猛船) 1척, 무군소맹선(無軍小猛船) 4척 도합 8척의 전선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맹선은 80명, 중맹선은 60명, 소맹선은 30명의 수군을 승선시키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경국대전』에 따르면 군산진에는 230명의 수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1512년(중종 7) 전라도 관찰사 남곤(南袞)의 건의에 따라 용안에 있던 득성창이 군산포로 옮겨와 군산창이 되자 군산진 만호가 직접 군산창[조선 후기부터 익산 성당창의 조운 업무도 직접 관리·감독함]을 관리·감독하였다.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서남해안 지역에는 왜구뿐만 아니라 밀무역·불법 어로·약탈을 일삼는 중국의 황당선(荒唐船)이 자주 출몰하여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었고, 군산진 만호가 해적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서남해안 지역 해방 업무를 국가 중요 정책 사안으로 인식하고, 전라도 일대의 해상 방어 체계를 정비하였다.
조선 후기 국가 경제를 좌우하는 호남의 조운은 영광의 법성창과 군산의 군산창, 익산의 성당창 등 3조창(漕倉)에서 관할하였다. 법성창[단일 조창으로 법성창이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음]은 해당 지역의 법성포 만호가 담당하였으나 군산창과 성당창은 군산진 만호가 관리하였다. 이에 군산진은 호남 최대의 조세곡 운반을 관할하는 관청이 되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군산 지역의 군사적, 경제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군산진 하나로 모든 업무를 처리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나타났다. 즉 군산진은 조운만 전담하게 하고, 군산도에 수군 진을 하나 더 설치하여 해방(海防)을 전담하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지게 되고, 1624년(인조 2) 군산도에 별장(別將)이 파견되었다[고군산진 설치].
조운 업무의 중요성 때문에 1710년(숙종 36)에 기존의 만호진에서 종3품 첨사진으로 승격되었고, 2년간의 조운 업무를 무사히 마친 군산진 첨사에게는 종2품 방어사로 2계급 특진시켰다.